젊었을 때는 메모를 하지 않았다.
'메모광'이란 수필 제목을 중학교 다니면서 배운 이후로 잊은 날은 하루도 없다.
하지만 나는 무엇인가를 따로 적어놓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글 잘 쓰는 아저씨가 학생들한테 건네는 덕담 같은 거라고 받아넘겼음이 틀림없다.
공부 열심히 해라, 부모님께 효도해라, 그런 맞는 말.
11살 딸아이가 유튜브에서 들었는지 반쯤 흉내를 내며 나한테도 들려준다.
"2차 대전은 언제 시작됐지?"
"1차 대전 끝나고요."
"에펠탑은 어디에 있지?"
"외국이오."
나는 싱거운데 저는 웃기는가 보다.
나를 설득시킨다. 웃자고, 그러면서 그런다.
"맞는 말이잖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폭우가 내린 토요일 밤에 봤다.
2018년 영화, 소문 많이 들었던 영화, 상도 받은 영화를 2020년 오늘 '우리 가족'은 봤다.
비밀을 하나 먼저 밝히기로 한다.
나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면 1시간 반, 짧으면 45분에서 흐트러진다.
왜 그러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 거기까지는 따로 말하고 싶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해놓는 것은 까닭이 있다.
두서 없이 적어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버릴지도 모르니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도 함께.
장식이 없으면 심심하긴 하지만 좋은 것, 벅찬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놓치는 것은 슬프니까.
차라리 허전한 것이 낫지, 안타까운 마음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서둘러 생각나는 것들을 적자.
그 영화를 마지막으로 찍었을 카카 카린을 2년이 지났지만 추모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기록하겠다.
빗소리가 굵어진다.
침수나 물난리도 새벽에는 잠시 멈췄으면 한다.
잠시 멈춤.
그것은 때로 불가항력에 대한 도전이나 기도, 바람일 수도 있겠구나.
내 희망이 네가 멈추는 것이라면 너는 기꺼이 그래줄 수 있는가.
전쟁이 그렇고 감당이 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거기에 담길 것 같다.
우선 지금은 시간당 100mm 이상 쏟아지고 있는 폭우 먼저, 그리고 진통제 없이는 계속 잠이 깨는 통증도 챙겨보자.
누군가 죽고 싶은 사람, 아니지 죽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먹고사는 일이 남들 같지 않은 사연들도, 또 멈춰야 할 것들을 불러라.
'어느 가족'에는 가족이 있으면서 가족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집단의 명명 작업은 어떻게 무엇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누군가는 '이름'을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 받게 되는 선물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이룬 '가족'과 이름과 이름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가족'을 두고 한번 생각해보자는 영화다.
'어느 가족'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 누나, 여동생이 있지만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없었다.
아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고 아빠라고 불러보라던 사람은 스스로 아저씨가 되고 만다.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아빠가 되지 못하고 아빠라고 불러 줄 수 있었던 마음을 쫓아간다.
달리는 버스를 뒤쫓는 장면만큼 사람을 슬프게 처리하는 방법은 몇 없을 것이다.
"나를 놓고 도망가려고 했던 거야?"
관계를 규정하는 말들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름 이전에 말투와 단어들이 있고, 그 말들을 싸고 있는 눈빛 같은 마음이 있으며 마음은 따로 이름이 필요 없다.
'어느 가족'에 나오는 사람들은 마음을 가졌다.
그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묻는다.
묻는다는 상투적이고, 그래 이 영화는 더 이상 상투적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가족이 어디 있느냐고, 어떤 것이 가족인지 보여달라고, 그래야 나도 보고 배우지 않겠느냐고 운다.
울음소리 없이 거기 나오는 여섯 명은 매일 울면서 산다.
누군가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장면을 강조한다.
도둑질 하면서 살아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사는 저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지 않겠냐고 떠들지만 공감되지 않는다.
구호만 무성한 혁명가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마치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 하고 있는 기획 상품인데 어떻게 그걸 놓치느냐고 가르치는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따뜻함은 천재성보다 더 위에 놓여야 할 가치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가져가고 싶은 것을 가져가세요,라는 그의 연출은 알고도 눈감아줬던 오래된 가게 주인 할아버지를 통해 삶을 대하는 자신을 내비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메모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가족을 그리기 위해서 사람을 알아야 했을 테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삶을 해석하는 일과 등을 맞대는 일이니까.
항상 관찰하며 떠올렸을 것이고 공부하며 적었을 것이다.
적지 않으면 다 사라진다.
적어 놓았기에 영화는 만들어졌고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영화를 보면서 뉘우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처지가 다행스러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동정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역겹다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무작정 친절하게 다 해주는 것은 위험하고 오히려 불손하다.
"돈 때문이었을까."
"돈 때문이었군."
그렇다고 하면, 그래 돈 때문이었다고 하면 사람은 어떻게 또 달라지는 것인지 죽은 사람을 두고 산 사람들은 고민한다.
살았지만 동시에 죽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족이면서 죽었지만 어떤 가족보다도 치열하고 인간적이었던 가족을 보여주는 영화다.
오래전 대학생이었을 때 봤던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누가 내게 붙여준 이름 말고 내가 선택한 이름, 아버지, 어머니.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