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은 것 하나에서
식사를 하다가 산이 이야기가 나왔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다.
저녁 7시에 가서 8시에 오는데 어둡기도 하고 날씨가 점점 추워질 테니까 낮시간으로 바꿔볼 것을 권했다.
자기는 지금 그대로가 좋단다.
하여튼 방방 뛰는 것은 좋아라 한다.
가끔 발차기를 하는 것을 보니 자신감 있어 보여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산이는 키가 또래보다 작아서 그게 좀 걱정이다.
아이 스스로가 잘 극복했으면 하지만 '키'라는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병원에도 다녔다가 주사를 맞고 그러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훈련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다 보니 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유튜브를 보는 일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제 시간을 꼭꼭 지켜서 챙겨본다.
아이들에게 그만한 재미가 없나 보다.
가만히 산이가 지키고 있는 매일 계획표를 살펴보니까 다른 때와 다르게 빈칸이 많아졌다.
동시 적어보기, 영어 CD 듣기 같은 칸은 며칠째 비어있다.
재촉하지는 않지만 환기는 시킬 필요가 있어서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본다.
강이는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는 스타일이고 산이는 재미난 것을 먼저 누리는 타입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강이는 빈칸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면서 산이는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학부모들은 이런 나를 부럽다 할지 모르겠다.
가끔 집에 찾아오시는 학부모님들에게 좋은 거라며 소개를 하기는 하는데 일단 푸념이 뒤따른다.
'애들이 말을 들어줘야 그것도 하는 것이지, 다른 거 좋다는 거 얼마나 많이 해봤는데...'
대충 이런 분위기의 푸념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하긴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해 왔던 것은 아니다.
산이 같은 경우는 6살 때부터 하루에 한 가지씩 자기가 할 일들을 하도록 도왔다.
그 하나를 산이 몫으로 떼어주며 하루를 지내면서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지켜봤다.
뭔가를 '시키는' 것은 재미가 없다.
뭔가를 알아서 '하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은 법이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본다.
어제 식탁에서 나눈 대화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4학년 때는 너 영어를 못했는데 어떻게 잘하게 됐느냐고 친구들이 묻는단다.
산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나와 같이 공부를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를 자신 없어하길래 그날부터 그럼, 영어공부하자고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아프기 시작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 걸 보면은 역시 인생이란 묘하다.
아빠가 가르쳐줬다고 그랬다기에 내가 설명해줬다.
'그게 아니라, 산이 너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었던 거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하고 같이 다니면서 물어보고 대답하고 이야기하면서 지냈던 모든 순간이 다 공부였어.
앞으로 너는 더 잘할 거라고 아빠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천천히 차근차근 잘 걸어왔거든. 그것도 산이 네 발로 직접 걸어왔던 거라서 튼튼하거든.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야, 즐거운 일이 될 거야.'
산이가 맨 처음 자기 할 일이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본다.
신발 정리였을까. 아니면 인사하기였을까. 자기 가방 제자리에 놓기였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고맙다.
그 작은 것 하나에서 아이가 자라나기 시작했으니까.
수학, 영어 같은 것뿐만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보듬을 줄 아는 그런 것들도 아이는 잘 배워갈 것이니까.
작고 사소한 것들을 잘 챙겨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아이들에게서 발견했다.
산이가 남겨놓은 빈칸들은 구김살 없이 의젓하게 챙겨질 것이다.
그것을 여섯 살 난 아이의 발걸음에서 깨달았던 날 아침이 나에게 오래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