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저에게는 고비였습니다.
어린 시절 성당에 가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계셨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와 같은 사람을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감이 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일부러 힘을 빼고 듣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가능한 그의 주변에 있던 공기가 내게 밀려오지 않도록 표정을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그러면서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촉수가 슬그머니 뻗어갑니다.
말해 봐, 말해도 돼.
당신도 위로받고 나도 그쯤에서 끄덕이는 마음 절편 切片이라도 생긴다면 서로 좋잖아.
부드러운, 그것도 하나의 위선적 태도에 지나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온화하려 합니다.
저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싫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힘들었습니다.
객관적 기준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항목별 체크 리스크가 있다면,
오히려 저 같은 자식은 불효한 편에 들고 말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숨어들었습니다.
숨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숨을 곳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숨어 지낸 것 같습니다.
성당에 가면 ´아버지´하면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가만 듣고 있다가 그다음을 함께 외웠습니다.
저도 주의 기도는 아주 잘, 아주 많이 외우면서 자랐습니다.
철들기 전부터 그 기도문을 입으로 말하면서 자랐으니까요.
저는 참 못난 사람입니다.
못난 탓에 제대로 기도 한 번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줄 모르고 멀리 피해 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날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가 죄받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그것입니다.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오 6:15
제가 딛고 서 있는 발판에 새겨진 말은 이렇게 적혀 있는 듯합니다.
후회와 반성이 가득한 벌판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떨어져 내리는 새벽 별들입니다.
빛이 하늘에 머물러 저를 비추는 동안에도 정작 어둠 속에서만 갇혀 지낸 모습입니다.
피하고 숨는 일은 그런 일입니다.
고개를 돌려서는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된 아버지를 하느님 아버지께 다시 한번 의탁합니다.
내 아버지를 온기 있게 보듬어 주소서.
내 아버지의 발밑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분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마태오 6:14
제 아들이 아버지 아버지 부르면서 다가오면,
제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것이 많이 미안하더라는 말씀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