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5

아침에,

by 강물처럼




한 장의 사진이 그 어떤 말보다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실되기에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이 생생하게 그 현장을 떠올리는 일은 이중적입니다.


내가 아니고, 여기가 거기가 아닌 것을 실감하는 일, 그래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을 어쩌지 못합니다.


죽을 것 같아서 숨고, 살고 싶어서 나서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 넓은 도로에 나섭니다.


줄을 지어 달리는 탱크 앞을 혼자서 막아섰던 89년의 천안문 광장,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던 87년의 이한열, 그리고 미얀마 군경 앞에서 총을 쏘지 말라며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타웅 수녀.





너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닌 것을,


나는 냉동 만두를 찌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내주면서 만끽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은 탓에 덜 자연스럽게 잘 잊는다.


아니, 잘 잊겠다.





미얀마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소나인´ 영문으로 어떻게 쓰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살이 쪄서 얼굴이 동글했고 늘 피곤해했으며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일본에 불법 체류하면서 돈을 벌어 미얀마에 보내던 내 동갑내기였습니다.


하루 종일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던 그는 내가 학교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면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반가웠을까 그때는 몰랐습니다.


함께 있다는 ´위안´


너도 외국인, 나도 외국인.


같이 일하면서 바쁠 때는 서로 정신없다가 한가해지면 담배라도 나눠 피우던 사이.


말 좀 배우라고 그렇게 말해도 웃고만 말았던 소나인.


언제 한 번 놀러 오라고, 미얀마 좋다고 그러더니 결국 검문에 걸려 추방당한 소나인.


보호소 창살 밖에서 그를 두 번 면회 갔을 때 봤었던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


체념은 먼저 빛을 앗아갑니다.


그 얼굴에 띤 미소는 단 물이 빠진 껌보다 형편없었습니다.


그렇게 웃지 마, 소나인.





그의 나라에 민주화,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를 잘 알지만 저는 소나인이 궁금합니다.


´로힝야족 학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좌익과 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우리의 40년대를 그들이 지금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옳다는 신념이 결국 사람을 죽게 했고 전쟁을 일으켰고 더 엄청난 사람을 죽였습니다.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요.


환경도 자연도 지구도 우주도 모두 사람들 가는 곳에 쓰레기뿐입니다.





사진 두 장을 보냅니다.


탱크 앞에 선 사람, 무릎 꿇은 수녀, 김수영의 시를 적어 보내려다 오래전에 보낸 일이 있었기에 생략합니다.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오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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