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하나를 보더라도 가치관과 세계, 취향이며 애정까지 고스란히 배어 나옵니다.
심지어 자본이나 기술, 또 그것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면 허풍 꽤나 떠는 축에 든다고 할 겁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요리를 먹었을 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기를 면하고자 하는지, 맛을 즐기고자 하는지, 아니면 아픈 몸을 달래고자 하는 것인지 등등.
지금은 면 요리를 잘 먹을 수 없게 됐지만 예전에는 많이 좋아했습니다.
라면은 말할 것도 없고 국수가 맛있는 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쌀국수도 가끔 먹으면 기분이 좋았고 스파게티는 아이들도 다 좋아합니다.
냉메밀이나 냉면, 일본식 야끼 소바나 우동은 없어서 못 먹지 언제나 환영입니다.
짜장면, 짬뽕은 제 전문입니다.
저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인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공감을 얻기는커녕 비웃음을 살 텐데 저는 정말 그렇습니다.
무엇을 재료로 썼는지 얼마나 오래된 솜씨를 가지셨는지 그 사람이 바빴는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인지 편안한 사람인지 혹은 게으른 사람인지 전해집니다.
눈으로 코끝으로 혀로 그리고 마음이 알게 됩니다.
제가 ´본질적´이란 말을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러 알게 되는 ´좋은 집´은 꼭 기억을 해둡니다.
그런 집을 한 번만 들르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에 가까워지면 사람은 흔연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양념에 혼란스럽거나 혹하지 않고 잘 들여다보게 될 때 그 요리의 맛은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만드는 사장님들은 골치도 아프시겠지만 신중하셔야 합니다.
책을 고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양념이 듬뿍 오른 책도 있고 화장이 진한 책도 있습니다.
아기들 살 냄새는 어떤 향수로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에게 엄마 냄새가 또 그러할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처럼 삶을 직시하며 살았던 분들의 문장은 남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슬픔에 가로막혀 새어 나오는 울음,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마는 사람들, 밤새 울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떨구는 눈물.
시절을 생생하게 살아본 사람들의 눈물은 다릅니다.
가볍지 않고 신파적이지 않습니다.
그새 벚꽃이 지고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하더니 그 위를 걷게 만듭니다.
나는 남은 봄을 세지만 우리 아이들은 봄이 가득 쌓여갈 것입니다.
뒷자리에 선 사람이 더 잘 볼 수 있게 앞사람이 앉아주는 계절이 지금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봄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봄.
서로에게 서로가,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