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 나오는 마지막 연입니다.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
바로 저것이 흔히 볼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지리산이면서 누군가의 마음이고 피천득 선생님이 서영이를 바라보던 시선이었으며,
또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이야기 아시죠.
흘러가는 것에만 주의를 빼앗기면 처량하게 들리는 전설 같습니다.
그러나 내 발에 새로 잠기는 그 물은 다시 아까 흘러간 물의 첫 마음입니다.
그 물이 그랬습니다.
거기까지 볼 줄 알면 지리산에서, 아니지요, 선암사 승방 앞에 놓인 선돌 위에다가도, 아니지요, 거기 깊은 해우소에 앉아서도 첫 마음이 휘파람 소리처럼 분다는 것쯤은 달달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풍길 것입니다.
어서 변하거라.
그렇게 노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잘 살필 것은 마음 줄기 같은 것입니다. 꼬물거리는 그것의 불빛이나 체취라도 좋습니다.
멀리서 비 냄새를 먼저 맡거나 구름을 읽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는 ´견딜 만´ 한지요.
그래서 좋은지요.
정말 괜찮은 것인지요.
나날이 변덕스러운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는데 이러고 있습니다. 갚을 것은 갚고 지을 것은 지어야 하는데 한 줄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발, 아니지요,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챙깁니다. 매일 지리산에 갑니다. 아무리 올라도 해 뜨는 선경 仙境은 저 같은 사람에게 요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줄 알겠습니다. 행여 견딜만하다고 믿는 불상사는 선암사 마당에다 벗어놓고 거기 은목서 나무에게 맡겨야겠습니다. 내 안에 시지프스가 돌을 굴립니다. 그 돌이 내는 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