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제 생각일 뿐입니다.
따로 불편해하지 않기를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사람이 마지막에 남기는 말, 유언이 필요 없는 죽음을 바랍니다.
그렇다고 정리되지 않은 채 막이 내려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한다면 죽음 또한 연극 속의 장면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된 시점이 탄생이 아니라 탄생 이전에 분명히 잉태로 맺어진 것을 아는 것처럼 그래서 그 시간이 소중했던 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시작의 시작이 있듯이 끝의 끝을 마련할 줄 아는 삶을 바라는 것은 이 바쁜 세상에, 그리고 화장터도 없고 땔 나무도 부족한 시대에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별이 이별이 아니라 하나의 절차에 지나지 않는 삶을 조금 불편하게 바라본다고나 할까요.
이별에게 이별할 시간을 주고 자리를 내어주고자 하는 것은 봄꽃이 지고 여름이 오기 전에 추억하는 꽃들의 잔영 같은 것입니다. 아직 봄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을 쓸쓸하게 하지만 ´늘 봄이다´ 그렇게 적는 말은 이별이 이별이게 해 줍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너에게서 나에게로 오는, 나에게서 너에게로 가는 징검다리처럼 정겨운 인상을 건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죽음은 연극 밖의 일, 무대 밖에서 - 그것은 마치 무대를 해체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귀속되어 - 처리되고 해결됩니다. 마무리됩니다. 계약이 끝난 배우들이 돈을 받고 골목길 앞에서 흩어지는 광경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래서 정이 없습니다. 정을 뚝 떼어버리고 없었던 일처럼 말끔히 그 자리가 새것으로 채워집니다. 소독약으로 닦아내고 시트를 새로 깔고 병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 한 번 시키는 리셋 Reset.
다음 차례의 죽음이 그 자리를 맡습니다. 곧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침대만 기억하는 죽음들입니다.
슬픔이나 분노, 안타까움, 억울함 같은 감정을 죽음 대신 기억하고 간직합니다. 영혼 없는 인사가 거기에서도 일상으로 건네 집니다. 언젠가 약국에는 자양 강장제처럼 마시는 ´감정제´를 진열해 놓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비타민 그러듯이 ´애도´ 한 병 주세요, 라며 돈을 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금방 밥이 다 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주문을 합니다. 지금은 밥을 짓지 않습니다. 밥솥이 하는 밥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밥은 없습니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고 그러지만 밥 한 끼가 늘 그리운 것은 무엇인가 싶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 요한 17:9
몸이 말라가고 몸에서 물기가 빠지면서 통증이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게 합니다. 눕지도 앉지도 못하면서 하루를 겨우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때 비로소 헤어질 마음을 먹습니다. 사람 아픈 것을 봐야 하는 것도 많이 아픈 일인 줄 알게 됩니다.
그 와중에는 남길 말이 없고 받아 적을 말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감정이 소실되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허공을 응시합니다. 그때 하는 말은 거룩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자연일 뿐입니다. 자연은 그저 순한 것입니다. 봄부터 있었던 모든 순간이 거룩하며 전 생애가 유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따로 할 말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기를 유언처럼 쓰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아이들 일기를 적어가면서 그 느낌은 선명합니다. 좋았던 것을 좋았던 대로 적고 부족한 것을 부족한 대로 적어놓고 훗날 - 가능한 내가 없는 - 새가 지저귀는 아침이든 노을이 붉은 저녁이든 천천히 꺼내보는 유언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꼭 하나 해보고 싶은 것은 나의 마지막에 ´허둥거리지´ 않고 꽃향기 같은 것을 흠뻑 맡아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