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과연 어떠한 시험들을 치러 왔는지요.
사소하게는 새벽잠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시험은 시작되기도 합니다.
아침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떤 옷을 입고 나설 것인지, 어느 쪽 길로 들어설 것인지 등등.
매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삶은 그야말로 시험의 연속입니다.
그런 생각도 듭니다.
과연 공부라는 것은 합리적 선택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는지?
파도처럼 시험이 물결치는 곳이 바로 여기 아닌가 싶습니다.
그야말로 시험 치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나고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 그러면서 사는 거라고들 하면서도 ´내 자식´은 그 시험에서 안전하길 바라며 갖은 공을 들입니다.
정성으로 키우고 가르칩니다. 정성으로 부족할 것 같으면 빚을 내서라도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키웁니다.
그것마저 시험인 것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사람들에게 주어졌는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냈는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선택이 시험이 되어버리는 곳에는 욕망이야말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선한 갈등은 없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실컷 벽을 더듬고도 스위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갈등의 가장 큰 줄기는 자기가 뻗어가려는 방향과 세상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 순간에 움을 틔웁니다.
무엇인가 흡족하지 않은 상태, 즉 불만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꿔보려는 시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구든, 그것이 무엇이든 하물며 칡넝쿨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자기를 바꾸려 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배배 꼬여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선택이 올바른 시험으로 작동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본질을 알아보고 물어야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르코 12:15
시험에 빠진지도 모르는 것은 슬픕니다.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어떡하라는 것인지, 어린아이 같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겠습니다.
천주교를 모르는 분들은 ´고해성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태도가 다분합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사람이 용서한다는 그 설정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연을 닮고자 하는 존재로서 저는 양쪽이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끄덕거리며 혼자 중얼거립니다.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저만치´를 두고 여기는 사람이 거기는 꽃이 있는 그것을 조망합니다.
여기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저기와 꼭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토닥거립니다.
저에게 고해성사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하나의 교리로 역할을 다하는지 어떤지는 관심 없습니다.
나 자신이 고해소 앞에 섰을 때,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무릎 꿇었을 때, 내가 만나는 분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을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칭하지 못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거대한 작업입니다.
저는 이름이 없어도 상관없는 그런 상태를 바람직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멋지게 들립니다. 통쾌하기도 하고 선량하기도 하며 높고 그러면서 낮은 일종의 화음 和音처럼.
잘 이루어진 화음은 화엄 華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혼자 웃어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코 12:17
Repay to Caesar what belongs to Caesar and to God what belongs to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