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지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히말라야 최고봉을 찾아다니던 엄홍길 대장이 북한산을 오르면서 ´모든 산이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던 것이 생각납니다.
줄곧 연습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아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입니다.
´소설 같은 것이라고 부를 때, 거칠게는 들리지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 데뷔하려면 어릴 때부터 오랜 훈련을 거쳐야 한다. 화가가 되는 것도 어느 정도 전문 지식과 기초적인 기술이 요구된다. 그러나 소설이라고 하면 볼펜과 노트만 있으면 그리고 얼마간 이야기를 끌어갈 힘만 있다면 전문적 훈련 없이도 일단 누구든지 쓸 수는 있다. ´
세계의 높다는 봉우리는 다 올라본 산악인이 했던 말이라서 더욱 오래 남았을 것입니다.
어디를 오르든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그 흔한 말이 그때부터 저에게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거니까, 불평하느라 애쓸 것 없다는 야릇한 체념조의 시선이 싫지 않았습니다. 대신 묵묵히 갈 길 가는 것으로 정했다고 할까요. 포기와 도전이 하나가 되어 굴러가는 과정을 즐긴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매일 포기하고 매일 도전하며 그렇게 조금씩 나아갈 줄 안다면 좋겠습니다. 한 줄 문장을 쓰는 일도 그렇고 라면을 하나 끓이는 일에서도 ´라면 같은 거´와 ´어떻게 하면 라면을 더´ 즐길 수 있을까를 두 손에 올려놓고 저글링 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하지만 링 위에 올라가는 것과 거기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느냐는 문제는 별개다. 소설가는 당연히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설을 오래 계속 쓰는 일, 그것으로 먹고사는 일, 소설가로 살아남는 일,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무엇인가´가 꼭 필요한 일이다. ´
직업으로서 소설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계속하면 잘하게 됩니다. ´저절로´라는 말을 사이에 넣고 싶지만 오래 계속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는 생각에 그만뒀습니다. 사실 원리는 쉽습니다. 한쪽 발이 물에 빠지기 전에 다른 쪽 발을 옮겨 놓으면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는 얼마간의 차이를 그 사이에 두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허무맹랑해지고 맙니다. 실상 實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래 계속하느냐인데, 우선 그 자체가 어렵고, 또 하나는 상대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혼자서라도 묵묵히 갈 수 있느냐는 차원이 높은 문제가 됩니다. 마치 사막을 가로질러 홀로 떠나는 라인홀트 메스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일기를 쓰라는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잘 옮겨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학생들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만 적은 것이 아니라 영양 빼고는 결핍된 것들이 많아 보입니다.
어제도 ´제주도´라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잠시 15살 아이가 7살이었을 적에 함께 제주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린이집 앞에서 하늘이 무척 파랬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날 생각에 없었던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에는 ´소풍 가기 좋은 날´이란 말에 단지 박자를 맞춰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공항에까지 왔고 거기서 우연이 우리를 돕는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인데 딱 2자리가 빈다는 말이 필요 이상으로 반갑게 들렸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칫솔 하나 들지 않고 - 7살 아이에게 제대로 ´농땡이´를 가르쳤던 그 2박 3일이 내가 기억하는 아이의 7살, 전부가 됐다. 기억하지 못한 시간들이 내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 시간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희는 시간을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록해 둬라.
이것이 대충의 전말입니다.
오늘 맨 처음에 썼던 말, 어떡하지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라고 했던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삶이 그래서 재미있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다음 장이 펼쳐지는 일, 거기에 적혀 있는 일의 대부분은 사실 정해진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인가에 끌려 다음 페이지에서도 그다음에서도 자꾸 익숙한 자신만을 써넣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더 하다가 하루가 다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까 더 이상 적을 것이 없고 적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날들,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 12:35
메시아를 모르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면 아슬아슬하다 못해 간절할 것입니다.
그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고 간절함과 동행하는 사람의 멋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것은 기도,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