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내성적이었을까요, 외향적이었을까요.
계획하거나 이성적 사고를 지향했을지, 아니면 탐색하며 원칙주의적이었던가요?
성격은 원래 무엇인가 싶어서 골똘해집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면서 또 얼마간은 서로 중복되는 영역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부쩍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순전히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나 불신을 경험하다 보면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겠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럴 때 ´합´이 들었느니 ´궁합'이 좋지 않다느니 하면서 위안 아닌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성격이 맞는다는 것은 어디로 보나 좋은 일이긴 합니다.
서로의 수고를 덜어주기도 하고 같은 일을 해도 유쾌하게 마무리 짓습니다.
같이 사는 일은 어떨까 싶습니다.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가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나을지,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더 매력적인 생활을 꾸려가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각각의 경우에 만족하는 사람도 봤었고 그렇지 못한 커플들도 많이 봤습니다.
한쪽은 ´그래서´ 잘 사는 것 같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그러니까´ 잘 못 살고 있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못나서 저렇게 멋진 결론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운명 같기도 해서 체념하는 것도 배우고 그러면서도 속을 끓이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관계 유지에 관한 책도 시중에는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과연 심리를 다루고 처세나 방법론적인 관점으로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 의아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시대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봐가면서 나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항체를 형성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양입니다.
병아리 눈물만큼 모이면 황새 주둥이만큼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삶이 부딪혀 오며 만들어 내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거칠고 팍팍하며 부조리합니다.
그래서 침잠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알맞은 거리라는 것이 있다고 다들 가르쳐 주는 듯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기에는 내가 작아도 너무 작은 사람인 것을 알겠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코 12:31
하느님은 공경하지만 다른 사람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현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말하고 떠들고 대꾸하며 가르치고 또는 성내면서 끼어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은 침묵하시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들 말이 없는 조용한 존재들 아닌가 싶습니다. 짖지 않는 개, 덤비지 않는 고양이, 말 잘 듣는 학생, 보채지 않고 울지 않는 아이, 말을 잃은 어머니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사랑이 어렵다는 말만 실컷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기도도 아니고 묵상도 되지 못하는 마음을 한 모 떠서 접시에 담습니다.
간장이라도 맛나게 잘 조리해서 드셨으면 합니다.
어제는 활기차게 시작한 6월이 오늘은 풀이 좀 죽었습니다.
이러고도 잘 흘러가서 어느 기슭에서 잠시 머물 때에는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빈 접시를 채울까 합니다.
그때 달빛이 밝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