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은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종교 또한 자본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집단은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없는 단체는 운영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갈대입니다.
다만 생각하는 갈대였기에 거기에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 시대에 생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나 싶습니다. 생각은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환금성이나 유동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졌고 일하지 않고도 벌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능력이 되었습니다.
일하지 않는 데에서 종교가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종교가 옷을 바꿔 입거나 사람을 떠나거나 사람들로부터 잊히겠지요.
그와 동시에 그래도 희망을 꿈꾸는 것이 낫다면 이 장면에서 하나의 지향점은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희망이란 손에 쥐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멀리 보이는 불빛 같은 것 아니었던가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 12:43
저는 돈은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인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에서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말하자면 돈으로 해결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것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소원하고 있는지요.
불안이 극복되며 그것은 무한한 어떤 것입니까.
돈이나 코인이나 부동산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비난받거나 무시당하거나 저 과부처럼 렙톤 두 닢을 겨우 헌금함에 넣으면서 살아야 하는 문제가 제게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는지요.
모든 신화에 행운의 신은 준비 되어 있지만 행복의 신은 없습니다.
행운이란 幸運, 겨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저승 앞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의 딸, 니케 Nike는 아시다시피 승리와 행운의 여신입니다.
니케와 한 핏줄을 나눈 이들이 바로 젤로스 Zelus, 크라토스 Cratos, 비아 Bia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젤로스는 질투, 크라토스는 힘, 비아는 폭력의 신이며 모두 니케의 오빠들입니다.
승리와 행운은 이런 것들 사이에 놓여있어서 사실은 아무나 찾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찾아가서는 안 되는 것인 줄도 모릅니다.
자본의 위험성은 ´나´를 망각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주체가 되는 나를 망가뜨리고, 나를 대신하여 나로 살아가는 그것에 내가 조종되고 끝내는 그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자본이 연출하는 영화 榮華의 시놉시스입니다.
어쩌자고 저는 이런 무지막지한 소리를 꺼내는지 그것도 무책임한 듯싶습니다.
그러니 걷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훈의 글에서 한 모금의 위안을, 또는 무엇인가를 얻기 바라겠습니다.
그는 감각에 솔직한 사람입니다.
-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할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
김훈, 자전거 여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