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 박노해

시의,

by 강물처럼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 박노해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이주 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오!

눈부신 맥도널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널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사자 새끼처럼

덥썹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 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창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카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의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여행을 떠나자.

머리가 길어도 상관없고, 신발이 해어지는 것이야 멋스럽지 않겠는가.

가지 않았던 길이든, 가본 적 없는 곳이든

나는 가야 하지 않겠나.

이만큼 사람이 가깝게 보이고 기쁘게 보이고 슬프게 보이는데,

가만 여기 머물고 있기에는 내 뜻이 갸륵하지 않겠는가.

카메라를 들고 갈 생각일랑 던져두면 된다.

패키지여행 가는 것 아니니까 가벼울수록 좋은 짐이다.

가벼워야 날아오르니까,

그만, 이대로 오늘 밤에 떠나자.

내가 가는 목적지는 야곱이 구두통 메고 하루를 걷는 거리.

또 다른 야곱이 살아가려고 걸어야 하는 거리.

또, 또 다른 야곱이 죽어간 오랫동안 걸었던 거리.

그 거리에서 먼지를 쓸고, 물을 뿌리고, 향을 피우자.

그 거리에다 꽃을 뿌리고, 입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자.

내 여행은 찾아가서 만나야 하는 여행.

입고 있는 옷이 해어지고, 행색이 초라한 것이야 얼마든지 그렇지 않겠는가.

본 적 없는 사람이었든, 못 본 척 외면했던 사람이었든

나는 봐야 하지 않겠나.

가서 봐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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