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43

아침에,

by 강물처럼

비 피해는 없었는지요.



읽은 책을 모두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책은 20년 세월도 무색하게 책장 한켠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詩學을 거기에서 꺼냈습니다.


개역판 11쇄 - 1997년, 스물일곱 살이면 취직 공부를 하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그때에 제가 그어놓았던 밑줄들을 살펴봤습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그 밑줄들에 이끌려 실로 24년 만에 책에 나와있는 문장들을 다시 만져봤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었구나.


어떤 말들은 지금 읽어도 뜻을 잘 모르겠는데 그때 저는 왜 거기에 표시 나게 줄을 그어 놓았을까요.


하나를 알고 그다음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리는 희열 같은 것이 책에는 있습니다.


책은 정직한데 그 책을 읽는 나는 그만큼 정직하지 못합니다.


혼자 읽으면서 내가 쳐놓은 밑줄은 마치 함정 같고 그물 같습니다.


거기에서도 허위에 깔려 허우적대고 방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문장에 깔 맞춤하듯 밑줄을 그어놓았지만 나는 시인이 되지도 시를 읽지도 못했습니다.


있어 보이는 것과 있는 것은 차이가 명백하니까요.



조선 후기 문신 홍석주의 ´학강산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집안의 자제가 일 년 내내 책을 읽지 않을망정, 단 하루라도 소인과 가까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이 소인과의 사귐이라며 경계를 당부합니다.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고 왜 우리는 공부를 시키는지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세 가지 모습 가운데 하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


옛 선현들은 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습니다.


배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고 배우고 나서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일깨웠습니다.


말하자면 처음과 끝이 모두 ´된 사람´으로 맺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든 사람이 되고 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전개였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꿰뚫고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사람 보기에 든 것처럼 보이려는 내 밑줄은 내가 못났다는 뜻이었습니다.


못난 것을 펼쳐 보이지 못하면 영영 아무것도 되지 못합니다.


다시 책을 읽으면서 오랜 세월 거기 갇혀 바람 한 줄 쐬지 못한 청춘의 밑줄에게 미안하다 전합니다.


못난 나를 만나 고생했다고 전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 루카 5:8



책 같은 존재들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와 같이 나를 위해 내 곁에 머무는 존재 아래에 무릎 꿇고 밑줄을 그어봅니다.


현학적이거나 눈치 볼 것 없이 살갑고 다정스럽게 그저 고맙다며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기도 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