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시작됐다.
첫날 영어와 과학 시험이었다.
집에 돌아온 산이가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로 먼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뜸을 들였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는 눈짓을 몇 번이나 주고받았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무슨 비밀처럼 시험 점수를 푼다.
나는 끝까지 별로 관심 없다는 몸짓을 유지했다.
그리고 산이 영어 시험지를 훑었다.
간접 의문문과 가주어 문장이 주관식으로 나왔다. 다른 객관식 문제들도 살펴보는데 그때서야 다 맞았다고 말한다.
저녁 늦은 시간에 잠자러 가기 전에 식탁에 앉아서 그랬다.
'나는 중학교 때 영어 시험을 다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산이가 수고했다는 말도 아니고 기분 좋으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때는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막막함이 생각났던 것뿐이다.
공부는 왜 하는 것일까.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목요일까지 시험을 보면 그다음은 계속 노는 일이 많다고 달력을 가져다 보며 날짜를 챙기는 산이다.
가을은 놀기 좋다.
수학여행 대신 현장 학습을 3일 연속 다녀오기로 했다며 체육대회도 있다고 좋아한다.
나는 이번 토요일에 지리산에 가려고 10일 전부터 스케줄을 짜고 고치고 또 짰다.
가을은 걷기 좋다.
시험 보느라 햇볕을 쬐지 못한 산이를 데리고 가을 내음을 맡으러 가을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자.
루카 복음 11장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요즘은 중간고사라는 말 대신에 1차 고사라고들 한다. 나도 거기에 따르기로 한다. 더 이상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세상에 없듯이 중간고사라는 말도 추억 속에 가만히 접어놓기로 한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순간 어떤 표정으로 산이를 맞이할까 망설였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어와 기술, 가정을 보고 온 아이니까 수고했다는 메시지가 내 표정과 몸짓에 담겼으면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손을 머리에 토끼처럼 하고 발을 끌면서 들어오는 아이, 중학교 2학년이면서 5살이나 7살쯤 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가 이 순간만큼은 어색하다. 너는 내가 꾸는 꿈처럼 생생하구나.
'밥 먹었냐?'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결국 그러고 마는 인생을 또 시전 했다.
궁금해서 일기를 쓰다 말고 '시전 하다'는 말을 찾아봤다.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말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누가 보니까 일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씁쓸하니까.
밥, 그것 말고 정말을 말해보라는 듯이 산이가 다가왔다.
이럴 때를 대비한 내 감정 매뉴얼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시험 잘 봤냐는 말을 묻지 않는 걸까.
산이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감정이다. 딸아이에게는 쪽지 시험을 봤든 그것이 무엇이든 미주알고주알 캐는데 말이다.
머스마는 이래저래 기대되는 것도 많고 짐처럼 짊어지는 것도 더 되는 듯하다.
감정도 찰랑찰랑 흔들리면서 전달되면 좋으련만 신기하게 거품이 가라앉고 좋게 말해서 담백한 기운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산이는 말했듯이 쌈박한 색상의 아동복을 입고 나에게 달려오는 7살짜리 영혼을 가졌다.
그 아이가 시험을 보는 것, 매번 나는 산이의 통과의례 같은 일들을 지나오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나이를 먹는다.
그래, 그거였구나.
내가 처음으로 아빠가 된 그 느낌으로 여태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래서 놀라고 감탄하고 좋아하고 당황하면서 나도 그때마다 매번 첫 경험을 하듯 너를 대하는 것이었구나.
데자뷔라는 말만 떠들 줄 알았는데 네 덕분에 나는 프랑스 말 하나 더 알았다. jamais vu 자메뷔, 익숙했던 것들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그것을 우리말로 미시감이라고 한다.
너는 특별하다.
네가 15살이 되면 나는 다시 15살로 돌아가고 그러면서 어느 날은 이미 어디선가 봤었던 너를 보고, 또 어떤 날은 그렇게 익숙한 너에게 쉬운 말도 건네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너를 통해서 나는 생을 여러 번 살아간다.
그러니 시험 따위에 쩔쩔매며 끌려다니지 말자.
이것부터가 호들갑이다.
그래, 아빠는 호들갑을 떤다. 그것도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이다. 너는 나를 이렇게 저렇게 굴리는 것만 같다.
데구루루 구르면서도 좋다고 웃는 나는 이제 정말 웃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국, 영, 수는 다 맞을 거 같다는 말을 남기고 너는 핸드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럴 때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아직 수학 시험도 남았으니까 시험공부하라고 다그치기에는 이미 사람이 풀어질 대로 풀어졌다.
말에 힘이 실리지 않으면 서로 민망하니까 슬그머니 집을 나왔다.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너한테 대꾸하지 않고 등만 보이는 것으로 겨우 나는 폼을 잡았다.
지나고 나면 아쉽고 허전하다. 때마침 10월이다.
하지만 산이에게 시험은 그런 풍류가 아니다. 산이뿐만 아니라 시험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홀가분함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당락을 떠나서, 점수를 떠나서 일단 그것이 끝나서 후련하다는 상쾌함이 몸안에 돌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에계계, 그게 시험공부였어?' 싶었지만, 시험이 끝난 마당에 그것은 할 소리도 낼 소리도 아니다.
성에 차지 않으면 침묵할 것, 겨우 그거 하나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나는 헛 산 것이다.
학교로 출발하는 아이에게 한마디라도 기분 좋은 쪽으로 건네는 것이 이롭다. 사람은 오묘하니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훨씬 많은 유기 화합물 집합체 아닌가. 게다가 '사고하는' 존재여서 말도 할 줄 알고 무엇인가를 계획해서 실행에 옮기는 기계체도 갖추고, 무엇보다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체로서의 작용까지 완벽하게 수행해 내는 옴니버스식 아티스트, 시간과 공간을 자유하는 메트릭스적 꿈에 도전하는 야생이 아니던가.
"시험 끝나고 친구들하고 놀다가라도 와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성심성의는 얼마면 돼? 같은 말을 닮았다. 산이는 어떤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있는 걸까.
초등학교 친구들은 많이 알았었는데 중학교 가고부터는 아이 친구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기억하고 있는 이름도 없다. 담임 선생님 성함도 사실 잘 모른다. 코로나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결핍과 상실을 '코로나' 때문이었다고 탓할 것이다. 그때는 그랬던 시대야, 그러면서 말이다.
다른 데 들를 데도 없었는지 시험을 마치고 그대로 집에 돌아온 아이는 조금 부담스럽다. 휴대폰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저는 게임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한다고 그러지만 나는 거슬린다. 하지만 시험이 막 끝났다.
그래, 제 말대로 수학까지는 다 맞았다고 해서, 그래서?
서로 묻는다.
내가 묻는 말은 그래서 다 맞지 못한 역사며 과학, 기술 가정을 향하고 산이가 묻는 말은 그래서 다 맞은 국, 영, 수를 내 보인다. 서로 묻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기로 하는 무언극이 아들과 아빠 사이에 펼쳐진다.
우리는 피에로가 되어도 좋겠구나.
세상이 무대라면 한번 웃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아직은 자그마한 아이의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에서 떨어진다.
'머리를 깎으면 공부했던 것이 다 사라져서 안 돼.'
그 말은 어디쯤 흘러가다 멈추서 우리를 떠올릴까. 지나간 것도 훌쩍 자라는 계절이다.
산이가 던진 말이 세상을 한 바퀴 다 돌고 다시 그 앞에 돌아왔을 때, 어느 쪽이 더 많이 자랐을까.
그때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중간시험을 치르는 중일지도 모르지.
중국 소설 홍루몽이 가르쳐준 말로 마무리하자.
'세상의 모든 일이란 좋은 일이면 끝나는 거고, 끝나면 좋은 거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