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던 길을 멈춥니다.
밖에서,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연히 수녀님들과 마주치면 길을 비켜서 듯 기다립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소음은 멈추고 차가 다니는 도로가 성전이 되어 반듯한 자세를 갖추기도 합니다.
마치 빛이 고운 단풍 아래를 우연히 지나치면서 고맙고 반갑고 다음에 언제 또 볼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나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운은 어디에서 솟는 것일까요.
대파가 몇 개 담아있던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던 수녀님도 있었고, 도갑사 쪽에서 월출산 정상으로 오르던 수녀님도 본 적 있습니다. 수녀님들이 머리에 쓰는 그것을 베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떠났던 배가 돌아올 때, 뱃머리 먼저 모습을 보이듯이 수녀님의 인상은 언제나 머리에서 시작합니다.
저에게 ´제자´된 모습을 묻는다면 저는 거기를 그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합니다.
나는 비록 그분의 제자가 아니지만 내 속의 어떤 것이 ´제자´될 수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세상이 내게 물어오거든 내가 보여줄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저는 내내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를 잘 기다리고 싶습니다.
미소 微笑를 아시는지요.
작아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할 때 사용하는 것이 현미경 顯微鏡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하는 형식이 미 微에 있습니다. 웃음이 그와 같다면 아름다워집니다. 미소 美笑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본모습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 길을 다니면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땅이 웃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안 보이니까요. 현미경을 들고 산에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겨우 사진기를 챙길 정도만 되더라도 그게 어디냐 싶은 것이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열심히 오르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어디냐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미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웃을 일은 없습니다.
삶은 미소 짓고 있는데 사람은 무표정합니다. 건강하려고 건강합니다.
어둡지 않고서 밝은 것을 흉내 내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호롱은 사라졌고 전등은 더 편리해졌습니다.
튼튼하고 밝은 것들로 세상은 장식되어 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해´로 전락합니다.
빛 공해, 소음 공해, 화석연료 공해, 공해라는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공해가 된다면 그때 우리는 ´제자´된 이들을 더욱 그리워할 것입니다.
작고 작은 것,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처음이며 시초 始初였습니다.
조금이었을 때 아직 어렴풋하고 또렷하지 않으면서도 정묘한 한 획을 긋는 일이 미소가 간직한 뜻입니다.
내가 일찍 미소를 알아봤더라면 나도 그렇게 웃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늦었어도 늦지 않은 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가 되지 못했어도 제자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내 십자가는 고해가 아닙니다. 저는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이 땅과 하늘이 보내는 그 작은 웃음, 만면에 도는 그 기쁜 색을 담아야겠습니다.
저절로 기도가 되는 걸음을 떼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