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입니다.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궁리합니다.
수고했다는 말은 선율을 따라 머리맡에 가닿을 것입니다.
마음이 전해지면 말이 시냇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졸졸, 찰랑찰랑, 퐁퐁, 쏴아 쏴아. 첨벙첨벙.
토요일이니까.
여태 지나온 내 삶에서 토요일 아침 같은 장면은 몇이나 있었던가 짚어봅니다.
목성균 수필집을 아끼는 편입니다.
혹시라도 올해 나머지 가을을 토요일 아침처럼 보내고 싶으시다면 한 번쯤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 나오는 몇몇 장면을 아무런 연출 없이 쓰여있는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다만 나보다 한 시대 앞서서 세상을 살았던 이의 다정다감한 시선을 따라가면서 고마운 생각 하나를 간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 삶에서 나는 무엇으로, 언제 그와 같았던지 ´영화를 보듯´ 그렇게 돌아봤으면 합니다.
시작합니다.
- 꽃가마가 넘어간 고개처럼 허망할 수 있을까. 가마가 앞서고 후행 後行이 길에 이어져서 넘어간 저무는 고개의 적막함, 틀림없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땅거미 질 때까지 숨어서 고개를 바라보는 총각이 있었으리라.
꽃가마가 넘어오는 고개는 기쁨이다. 고갯길의 수풀조차 술렁이면서 새각시를 맞이하는 것만 같다. 산협 山峽의 혼사가 어디 뉘 댁만의 경사이랴. 마을의 잔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산협에 잡혀 와서 시집살이에 들게 된 새각시는 한동안은 고개를 바라보며 시집살이의 애상을 삭여 내야 한다. 그래서 고개는 여인의 한이라고 했다. 새각시는 저녁 우물가에서 노을 지는 고개를 바라보며 눈물짓지 않는 날이 없었다.
-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고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터이지만 아무도 서낭신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 굽어서 흘러온 냇물은 자근자근 속삭이며 한들 모퉁이를 돌아서 흘러갔다. 노을이 빨갛게 물든 수면 위로 피라미들이 은빛 찬란하게 뛰어올랐다. 피라미의 도약은 수면을 나는 날벌레 포식 捕食의 한 방법에 불과한 것이지만 성장기의 미숙한 감수성은 피라미가 노을에 취해서 무모한 도약을 하는 것이라고 눈물겨워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찬란한 도약을 해볼 것인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지는 노을이 나를 더욱 눈물겹게 했다.
-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듬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아내가 누비처네를 쓸어 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겨우 처음 두세 편의 수필에서 끄집어낸 것으로도 벌써 가득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밑줄 긋지 않았으며, 절대 남의 글을 옮겨 쓰지 않았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냐 싶었습니다. 차라리 잠을 자고 말지.
지금은 왜 이렇게 담아두고 싶은 것들이 ´천지삐까리´인지 바쁘고 즐겁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은데 말입니다.
저는 이럴 때 ´힝´ 그럽니다.
이것도 하지 않았던 ´짓거리´입니다.
하나만 더 적고 나머지는 맡기겠습니다.
토요일 아침을 책만 읽고 보낼 수도 없으니까요.
- 다랑논이 욕심 없는 사람처럼 ´착하고 부지런히 사는 끝은 있는 법이여-´ 다독다독한 말 한마디를 간곡히 내게 들려주는 듯했다. 나는 사람 사는 것이 다랑논 부치는 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랑논을 보면 삶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하는 게 얼마나 건방진 수작인가 싶다. 다랑논을 삶의 원칙 같다. 다랑논의 경작은 삶에 대한 애착의 일변도 같다.
거기에 예수님 말씀이 동행합니다.
지금은 단풍, 절정으로 가는 가을 주머니에 서둘러 쪽지를 건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 루카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