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장갑, 신발, 그리고 양말.
맞습니다.
둘이 있어야 하나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짝´이라고 합니다.
물건에만 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짝은 뒤가 되고 시작은 끝과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것이 숨어 있습니다.
´짝´은 똑같거나 가장 비슷한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것도 짝이 됩니다.
사람들을 보면 그 모습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물어보면 아마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서로 닮은 사람끼리 살기,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하고 사는 것, 어느 쪽이 맞나요?
저는 ´짝´이란 말이 듣기 좋습니다.
불안한 존재인 사람에게 짝이 있어서 그나마 사람 사는 일이 덜 눈물겹습니다.
남편을 일찍 잃은 저희 어머니 같은 사람은 무엇이 그 짝이었던가 싶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을 의지 삼아 살아가기도 하고 또는 직업이나 취미도 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늘 성당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 살든 성당이 있느냐 없느냐가 어머니 삶의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짝´이란 말이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옆에 있어서 나를 돕는, 나를 위하는, 나를 완성시키는 것도 짝이지만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짝의 본성입니다.
그 짝은 하나일 수도 있으며 여럿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하나라는 말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초롱초롱 빛이 납니다.
거기에는 순결도 있으며 순수함도 깃들어 있어서 사람을 안도하게 합니다.
제가 여럿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런 것입니다.
나를 이루는 요소가 생각보다 여럿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저에게는 많습니다.
그래서 뭐가 가장 좋더냐는 질문이 나도 모르게 자주 써지는 듯합니다.
바다도 있어야지, 산도 있어야지, 하늘도 저는 필요합니다.
그거야말로 궤변이라고 하더라도 저는 ´짝´이란 말을 이상향인 듯 바라봅니다.
완전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무엇이든 그에 딱 들어맞는 짝이 있는 것도 맞지만 저는 그다음으로 넘어가 보고 싶습니다. 무한한 공간에서 스치듯 만나는 두 점은 그 뒤로 흘러가는 일만 남습니다. 스치듯 만나는 일도 기막히지만 영원히 그것으로 작별인 것은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짝에는 그런 애상미 哀傷美가 있습니다.
그러니 잘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내 짝은 ´지금´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그 말, 카르페 디엠 같은 말.
무엇이 끌렸던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들이 지우지 말고 가만 놔두라며 받아 적습니다.
"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of God, which i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신의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른다.
믿음의 짝으로 무엇이 어울리겠는지요. 별의 짝은 별이어야 하는지, 달이면 그림이 더 낫겠는지요.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17:4
믿음의 짝은 용서가 되고 용서의 짝은 사랑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나는 결국 스치고 지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게 된다면 제 바람은 저를 태우고 어디까지 날아갈 것입니다.
뿌리가 떨어지는 가을 잎들을 상관하지 않듯이 그러면서도 짝으로 살아가는 그들처럼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싶습니다.
걸음의 짝은 길이고, 길의 짝은 시선이며, 시선의 짝은 현재입니다.
제가 그리는 이상한 그림이 재미도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