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움직입니다.
달라진 것 없는 달라진 아침입니다.
우리 집에도 ´자가격리´ 하는 꼬마가 생겼습니다.
같은 반 친구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누군지 알려고도 하지 말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코로나 시대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도 가서 검사를 받았고 음성 통보를 방금 받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반´ 강이는 25일까지 자가 격리 후 다시 검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같이´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아도 공감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2019년 2월에 썼던 짧은 글을 대신 옮깁니다.
그리운 얼굴, 이란 말이 어떤 느낌인지 저에게 일러줬던 분입니다.
´복수´가 찬다는 말은 무섭게 들린다.
배에 물이 찬다.
나는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안다.
주말을 이용해서 고창에 다녀볼 생각이다.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마트 사장님을 보러 가고 싶다.
영춘봉에 오르기도 하고, 전불 길을 걷기도 하면서
´죽기 살기로´ 몸을 움직이면서 지낼 거라던 그의 음성이 아직 따뜻하다.
같이 걷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같이 걷는 일이 그에게는 허전한 일일 수도 있어서 머뭇거리지만,
이별을 향해서 걷는 것이 아니니까.
약속을 하고 기억하고, 또 하루의 삶을 층층이 쌓아놓는 일이니까.
병실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지내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프구나.
더 아픈 사람은 누워있고 덜 아픈 사람은 움직이는 거지.
안 아픈 사람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구나.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좋기도 하겠지만 슬프기도 하겠다. ´
때로는 셋이서, 그러고 보니 우린 셋이란 구조를 좋아했다.
현경 씨가 있을 때에도 셋이었고, 경환이가 있을 때에도 셋이서 다녔다.
마치 동갑내기 말 두 마리가 앞에서 손님처럼 그들을 실어 날랐다.
우리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이 애잔했던 마음에 실컷 태우고 달렸던 거 같다.
먼저 떠난 그 친구들이 오늘은 어디에서 다리 걸치고 앉아 있을까.
석양이 깊이 물드는 날에는 슬그머니 얼굴들을 만져본다.
잘 있느냐는 말은 어색해서 여전히 묻어두고 잘 생겼다든지 예쁘다든지 그 말만 읊조린다.
2월 13일.
3월이 멀지 않았다고 말해도 좋을 때에 나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잠깐 아주 잠시만 머물러도 되겠다.
셋이 달리던 그런 날은 이제 없다.
대신 주말이면 고창에 가서 하늘을 실컷 봐야겠다.
바다에도 나가보고 다시 한번 방장산 꼭대기에 올라 사람 좋아 뵈는 마트 사장님의 웃음을 보고 싶다.
우리는 몸이 아픈 그날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을 떨치고 어떤 시간을 쥐고 있는지에 답해야 하는 시험을 치기 시작했다.
그 시험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한다.
어느 때든지 재미로 시험을 본다는 사람들은 부럽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우리가 풀어야 할 시험지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어떤 미련도 남지 않도록 자기가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다 적어봤으면 좋겠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늘 아쉽고 쓸쓸했지만 바이올린은 세 줄로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끊어진 줄에 연연하지 않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연주하고 나면 운명마저도 기특하게 보일 것이다.
다 갖춰졌을 때 찾아오는 허전함은 문고리도 건들지 않고 발을 들인다.
그 허전함이 나에게 요구할 것이다.
´무엇으로든지 저를 위로해 보라고. ´
무엇으로도 소용없을 때 그때 내가 꺼낼 악기가 바로 줄 끊어진 ´나´인 것을.
내가 내 운명을 쓰다듬는 평화가.
살살 간지럽히는 시간이 유리창에 따뜻하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