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35

아침에,

by 강물처럼

그 눈빛이 생각납니다.


하얗게 탐스럽던 목련 꽃이 지고 철쭉 꽃망울이 피어날 무렵이었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경계가 흐릿한 것이 나이가 들었다는 속삭임 아니고 무엇일까 싶습니다.


작년인지 그전이었는지 날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얼굴만 떠오르고 꽃이 예뻤다는 것이 그 배경입니다.


젊었을 적 기억은 양파처럼 겉에서 속으로, 얼굴에서 표정으로 친절하게 클로즈업되는데 엊그제 격포에서 만나고 온 친구들 모습은 봄날 그린 수채화처럼 울긋불긋하면서 흐릿합니다. 다만 봄기운이 손으로 만져지는 그림, 내가 희끗해지면서 내 손은 마음 같은 것들을 감촉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런대로 좋습니다.



´좋은 거 같아요. ´


그 말이 좋은데 일부러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 부끄러워도 ´좋아요´라고 최소한 좋은 것과 싫은 것은 그대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양보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고 친절도 아닌 듯합니다.


그저 애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감정에 대한 내 태도가 살짝 수줍고 마는 것이 나한테 미안하더라는 발견, 그래서 저는 좋아요 그렇게 말하기로 합니다. 이거 마음에 든다. 그렇게 말입니다.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씩씩하고 싹싹하더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아하던 친구였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만큼 내가 잘 알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젊을 때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란 말도 서슴없었는데 이쯤 와서 보니까, 이름이야 생각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리운 것은 새록새록 해질 수 있더라는 사실.


그래서 편안하다고 그러는가 봅니다.


박경리 선생님도 박완서 선생님도 편안해 보입니다.


아, 급하게 바다 내음이 풍기는 통영 언덕이 펼쳐집니다. 의자는 거기 있는 의자에 앉아야 제맛이던데요.


겨울에 한나절 여유가 나면 가만 앉았다가 돌아오고 싶어지는 풍경이 통영 어느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 친구는 3가지 질문을 받아주기로 했었는데 하나만 겨우 묻고서 떠났습니다.


그 시시한 질문, "왜 머리를 기르세요?"


나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꼬투리를 잡은 것인데 왜 머리를 기르냐는 질문에 서운했습니다.


그래도 그 대답을 참 길게 했습니다.


선운사 마당에서 도솔암에 오르는 내내 인연 되는 것들은 다 끄집어내어 이렇게도 엮고 저렇게도 엮었으니까요.


이야기할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가 꽃이 되고 있는지 어떤지.


저 얼굴에 피는 꽃은 내 여기에서 퍼져 나간 이야기 꽃씨가 벌써 발화한 것입니다.


선운사 동백은 본 적 없지만 그 얼굴에 핀 것이 동백이었다고 믿습니다.



그 친구가 어째서 이렇듯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의 약속처럼 떠오르는가 짚어보면, 아마 그 꽃이었던 표정 때문인 듯싶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러니, 싶은 음성과 말씨와 눈빛과 기운.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뒤에 남을 사람에게 미안해 하, 어땠을까요. 차마 다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나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것이 저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이냐고 마주치면 물었습니다. 딴에는 즐겁고 싶었습니다. 우울한 바탕에 물을 들이고 싶었습니다. 감물이든 쪽물이든 무늬가 생겨나는 대로 그리고 볕이 만드는 따뜻한 색감을 덮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



너는 어쩜 그럴 수 있나. 서두르지 말라는 그 말을 촘촘히 다시 깔아봅니다.


그것은 징검다리도 되어 냇물을 건너기도 하고 은하수가 되고 오작교도 됩니다. 겨울을 지나는 칙칙폭폭 기적 소리 같습니다.



그러니까 작년이 맞습니다.


작년 백일홍 나무에 잎이 무성했던 계절에 격포에서 배를 타고 위도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있는 그 친구의 위패 앞에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 루카 2:29,30



12월 29일, 사흘 남은 올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고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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