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왜 그러느냐고 따질 때 쓰는 표현입니다.
물론 요즘 이런 말 쓰면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이것은 네 글자입니다.
이 말을 우리네 익숙한 투로 바꾸면 아마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무슨 웬수를 졌다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억하심정 抑何心情.
위에서 누른다. 억누른다고 할 때 쓰는 그 억 抑입니다. 하지만 억하심정은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푸념이며 하소연이고 불만의 표시입니다. 간혹 우리는 억울 抑鬱 한 일을 당합니다. 마음이 답답한 체증이 바로 울증 鬱症입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 憂鬱은 그 체증이 근심이 되는 일입니다. 나쁜 콜레스테롤은 혈관에 쌓여 혈전이 되고 그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합니다. 감정이 지나다니는 통로에도 빽빽하게 그늘이 들어서면 사람이 빛을 잃게 되고 그것은 우울이 됩니다. 서늘하고 어두운 공간에 자신을 방치하고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때로는 그 옆에서 술을 마시며 남처럼 자기를 대합니다. 쓸쓸하게 내버려 두는 일이 우울의 패션입니다.
억울하다는 것은 그 우울이 갚아지거나 풀어지기는커녕 대놓고 자기 탓으로 전가 轉嫁 될 때 그때 생겨나는 필사적인 반항입니다. 꾹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억울한 사람은 병에 걸립니다. 그것은 괴로운 일이니까요. 그 직전에 쏟아지는 안타까움의 토로가 ´억하심정´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것입니다. 저기 나오는 저 억 抑이야말로 말로 다하지 못하는 마음의 응어리입니다. 그것은 보통 이상의 흔히 볼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됩니다. 억누를 줄 아는 자세는 몸을 굽히고 또 머리를 숙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어여쁘기도 합니다. 조심하고 삼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보기 좋습니다. 그 좋은 것이 어떤 우여곡절을 만났기에 말이 되어 나오지도 못하고 단말마 같은 통증을 품었을까요. 어찌, 도대체, 그래도, 그 마음이 저 글자 억 抑에 담겨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느냐, 무슨 억하심정이냐.´
왜 사냐건 웃지요.
시인은 똑부러집니다. 구구절절 읊어대지 않고 저와 같이 명료해야 할 텐데, 저는 영 아쉬운 사람입니다.
누가 너더러 대답하라 했느냐, 저는 늘 때늦은 뒤에 그 뜻을 알아차리고 맙니다. 이 땅이 낳은 늦둥이가 바로 접니다.
왜?라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화폐처럼 대접받는 지갑을 하나 마련하는 꿈.
저 말 앞에 내 꿈을 적은 팻말을 세우겠습니다.
자식을 보면, 그것들이 까불면서 밥을 먹는 것을 듣고 있으면, 저희끼리 지지고 볶는 것이 나에게 물결칠 때에.
왜 사냐고 물으면 웃으며 백기를 들고 싶습니다.
조건 없이 항복, 대신 우리 애들하고 웃을까 합니다. 웃지요, 그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헤로데는 2천 년이 지났어도 죄인입니다. 그 많은 억하심정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8
그러니 사람은 사람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 그 마음이 사람 마음인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