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5개, 어느 쪽 길을 가느냐에 따라 신호등 한두 개는 더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도시 외곽 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를 달리다 보면 신호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시내 안에서는 차들이 많기도 하지만 신호 때문에라도 이동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내 몸속의 감각은 신호등 대기 시간을 도무지 계산에 넣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몇 번을 지각하고 당황하면서도 그러다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쳤으면서도 그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습니다.
대충 처리합니다. 어쩌면, 아니지요, 명백히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거기를 그냥 지나칩니다.
당사자적 마인드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주관하는 입장과 참여하는 입장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결혼이나 장례식을 생각하면 주인과 객이 어떻게 다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이 시험장에 지각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만약 어떤 약속이나 모임에 내가 줄곧 지각하는 편이라면 스스로 물어볼 일입니다.
나는 여기에 발을 얼마만큼 들여놨는가.
그 얼마큼, 정도의 차이를 게으름이나 방관, 더 나아가서는 오만이나 교만이란 말로 메꿔보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을 너무 얽어매면 안 되니까 편안함, 자유라는 말도 옆에 두고서 그 시늉을 가늠합니다.
미사에 복사를 하러 가는 날에는 미사 시간 30분 전에 성당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차로 성당까지 대략 10분을 예상합니다. 상황은 늘 바뀌는데 저는 항상 10분, 그러니까 신호등 한두 개는 벌써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계획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호등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려니´ 싶은 것이 은근히 똬리를 틀고 거기 틀어박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를 닮아간다고 떠들지만 ´이익´이란 개념이 내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저는 ´이익´ 우선주의가 되었습니다.
이익이 될 만한 것에는 공손하며 적극적입니다. 빠지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자리를 지킵니다. 에티켓이나 예절, 그보다 더 한 것도 얼마든지 잘 지켜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좀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도 이익이 되는 일인데 그만큼 인기가 없습니다. 사는 일이 매일 노동인 사람이 있고 사는 일이 고통인 사람도 있으며 사는 일이 즐거워서 또는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 ´공부´ 아니겠냐고 말하면 여기서 당장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가만 공부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 게으른 학생은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경우는 교만할 때입니다. 거기에서도 겸손이 빛을 발합니다. 유사품 아니라 진품, 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은 책을 바르게 펼치고 정성으로 들여다봅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겸손을 어디에서 배웁니까. 광에 가득히 쌓아 올린 골동품 가운데 먼지 쓰고 끼어 있을 것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고마워하라는 뜻이었구나.
애썼다는 말은 돈 버느라 수고했다는 말이 전부가 아니라, 그 속에서 고마운 것을 지키느라 고생했겠다는 말. 고마운 것이 하나 없었을 텐데도 자신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켜줘서 대견하다는 인사.
누가 나를 만나러 오면서 매번 늦는다면 그는 게으르거나 내가 그만그만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높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유라고 한다면 다른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마르코 6:52
연기가 날 때는 바람 부는 쪽으로 얼굴을 피하듯이 마음이 완고해질 때는 어디를 향하면 되는지요.
마음이야 완고해진들 손해 볼 것까지야.
잘못된 계산기를 가지고 있으면 계산은 늘 틀립니다.
그것이 완고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