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요,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으로 전부가 아닌 것을 깨우쳐 줍니다.
고백하자면 옛날에는 열심히 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역설 逆說입니다.
죽으려는 자는 살 것이다.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잘 몰라서 게을렀다면 지금부터는 일부러 게을러지겠습니다. 피할 것은 피하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잊겠습니다. 잘 게을러져서 챙길 것을 챙기겠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 여유를 회복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다독여줄 줄 아는 그런 심장을 마련하겠습니다. 밤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싶고 꽃이 피고 지는 날을 찍을 수 있는 눈, 그런 화소 畵素가 저한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게을러지기로 마음먹습니다.
느슨해지지 않으면 찰나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챙겨 먹어야 할 것이 거기 있습니다. 느리게 느리게, 실컷.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비슷한 팔자가 하나 있습니다.
내 탓인지, 그의 탓인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이제는 바꿀 마음도 없습니다.
찬란한 것이 왜 찬란한 것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세월을 지나온 파도가 만든 교향곡, 그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모래알을 듣고 있으면 허물어지지 못한 내가 외톨이 같습니다.
빛이 되어 본 적 없는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바라봅니다.
같은 해, 나와 같이 초라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학교를 다녔으며 성당에도 다녔던 친구.
똑같이 대학에도 떨어졌고, 혼자 몰래 다녀오려던 군대도 결국은 강원도 춘천까지, 아니 양구군 팔랑리와 인제군 천도리, 옆 동네에서 군 생활을 다 했습니다. 너도 맞았냐? 서로 병원에까지 맞고 후송 갔던 추억담이 같았으니까요.
그때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아직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던 같습니다.
나도 버티니까, 너도 버티길, 네가 버티니까 나도 버텨야 하는 거.
젠장 맞을 팔자는 그 뒤로도 얼추 비슷한 길을 갑니다. 정말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결혼도 1주일 차이로 했습니다.
서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그 순서도 내내 같습니다.
살면서 처음 수술대 위에 올라서 긴 수술을 하고 뱃속에 위 胃를 전부 떼어낸 다음날, 그 친구는 새벽 작업을 하다가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손가락을 다 잃었습니다. 빈틈없이 야무진 일처리로 소문난 친구가 왜 그랬을까, 그때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 복도 이쪽에서 저쪽까지 걷는데 그 팔자라는 말이 문득 떠올라 눈물이 났습니다. 너는 좀 다르게 살지, 그러냐.
몇 개, 잊지 못하고 내 기억에 남아 기억 자체가 된 말들이 있습니다.
95년, 늦가을 비가 내리던 새벽, 동경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휴대폰이 없었고 기숙사에 놓인 전화 하나로 모두가 사용했던 시절입니다.
밤 열두 시가 방금 지났을 시간입니다.
전화 왔다며 나를 부르는 소리, 국제 전화니까 빨리 받아보라는 말에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습니다.
"거기서 뭐 하냐?"
대뜸 그 소리가 먼저였습니다. 반갑기 전에 비 내리는 밤에 청승맞다 싶어서 시큰둥하게 대꾸했습니다.
"잠 안 자고....."
거기는 비가 안 왔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긴 숨을 들이켰습니다.
"나 방금 죽을 뻔했다. 여수 가는 길인데 졸음운전하다가 거의 사고 나기 직전이었다."
친구가 죽을 뻔했다는데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서 방에 들어가 잠이나 자고 싶었습니다.
그다음 말은 영영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보고 싶은 거 보고 살아야지, 이게 뭔가."
"거기서 고생하지 말고 들어와라, 얼굴 보면서 살자."
기도하지 않는 나는 기도합니다.
그가 잘 살기를, 나보다 오래 살기를.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거 같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르코 3:5
애틋한 것만 갖고서는 요리가 안 됩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도 되고 애인도 되고 부모 자식도 됩니다. 모든 관계는 서로 배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없어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먹을 것이 생깁니다. 먹지 않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도 파도도 햇살도 저마다 맛있는 식사를 즐깁니다.
오그라든 것들에게도 먹을 것을, 그러면 다 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