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麵은 포기 못하지
나처럼 위가 통째로 없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음식은 면 요리다. 먹음직스럽게 김이 오르는 스파게티를 앞에 놓고 한숨을 쉬는 사람은 아무래도 의아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라면은 더 할 말이 없다. 라면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 확실히 수상하다. 밀가루, 그것으로 만든 면 麵, 사람들이 운명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저 한 글자다. 출렁이는 보리밭처럼 보기 좋은 것이 있을까. 파릇하던 것이 누렇게 익어가는 속에 사람도 풍경도 가루가 되고 밥이 되고 그냥저냥 풍년이었으면 싶은 마음이 맴을 그린다. 농사의 농 農 자도 모르는 나는 무슨 꿈을 그렇게도 자주 꿨을까. 밀이 자라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늘 밀이란 것은 가루였다. 하얀 분말로 손에 닿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서 내가 다 사라질 것만 같고 사라지고 싶어지는 허무한 감촉이 거기 있었다.
산이가 - 중학교 3학년이 됐다. - 라면을 끓여줄 때가 있다. 왜 나는 그런 것이 멋쩍은 사람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체질적으로나 태생적으로 손님이 되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는 쪽이 편하다. 편하게 다가오는 것들은 모두 운명 아니었던가. 산이는 정성으로 라면을 끓인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레시피를 동원한다. 그래, 그런 것들이 다 보이면 아무래도 사람이 갸륵하게 보인다. 사소한 것들이 기특해질 때, 감정이 물결친다. 그것을 가끔 우리는 감동이라며 터뜨린다. 하지만 사람은 상대성 안에서 유희하는 촛불이나 풀잎 같다. 시간의 상대성, 힘의 상대성, 더 말하지 않아도 숙연해지고 마는 내 상대가 되는 것들과 내가 상대하지 못하는 것들, 그 수많은 피 彼, 아 我, 그 사이를 떠도는 유령들. 라면이 나올 때까지 내가 외웠던 것은 주술일까, 주 기도문일까, 넋두리 같은 것일까.
빗줄기가 간간이 내리는 중에 찬 바람이 불었다. 강원도 어딘가에서는 눈이 내렸고 어김없이 고속도로에서 눈길 미끄럼 사고 소식이 났다. 얼마 전 산불이 크게 났을 때 이렇게 추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때를 맞추는 일, 그 하나가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듯한 인상이다. 지배당하는 나는 어떤 백성인가. 내가 바라보는 때는 어떤 군주인가.
"자기 먹을 것은 쫄깃하게 끓이고 아빠 라면은 더 익힌다잖아요."
나는 그 말에도 움츠러든다. 고마운 것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의미 없는 허세는 그만 접어도 된다고 속삭여주는 것이다. 힘들이지 말고 원래로 돌아가라, 너 편한 것이 나 좋은 거니까 네 사이즈를 입어라. 마치 법구경 같은 라면 한 그릇을 공양한다. 이것도 그러니까 살 만하다는 말은 참 인간적이다. 물도 씹어 먹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미음 같은 거라도 들어가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면을 삶고 요리를 한다. 저것을 먹겠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뜻은 살겠다는 뜻이었던가? 면을 끓일 때마다 나는 나를 실험한다. 삶을 삶아본다. 그 가느다란 것을 음미한다. 뭘 안다고. 내 입은 세상을 닮았다. 세상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을 궁리하지도 않는다. 지금을 즐기라고 곳곳에서 난리다. 입과 혀는 그대로 세상을 즐긴다. 한순간, 꿀꺽하고 삼키는 그 경계를 자각하는 일이 그대는 어렵던가, 나는 너무나 쉽다. 그대의 어려움은 위장의 대비, 튼튼하고 값진 위를 가졌기 때문이고 내 감각의 예민함은 거기가 비었다는 은유에서 싹이 튼다. 나는 통증을 시처럼 읊을 때도 있고 긴 소설로 각색할 생각에 소장부터 대장, 그리고 말하기 민망스러운 데까지 상상을 덮어 씌운다. 무지개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상상이 즐겁다. 떨림처럼 지나가는 간격, 그 간격에서 머리부터 나오는 복통의 탄생을 기대한다. 이름을 짓고 그것을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국수를 먹을 때는 성자도 될 것 같다.
우리 딸은 밥 먹을 때가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다. 문을 활짝 열고 언어를 풀어낸다. 금빛, 은빛, 수정 구슬이 넘나들면서 내 밥까지 청량하게 승화시킨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느냐고 일러주신 음성이 나에게로 쏟아진다. 강이가 하는 이야기들이 반찬보다 맛있는 날이 많다. 미안하다, 나는 그것을 다 받아 적지도 못하고 기억은 더 못하고 산다. 우리는 서로를 가르친다. 베틀을 만져본 적이 없는데도 날줄과 씨줄이란 사랑스러운 말을 강이하고 나는 짓는다. 밥 한 술 뜨고 짓고 찌개를 뜨고 짓고, 그러다가 밥 먹는 것마저 잊은 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 6학년 딸아이하고 밥을 먹는데 시금치하고 냉이가 나왔습니다.
지금이 철이라서 둘 다 맛이 올랐습니다.
아이가 냉이보다 시금치가 맛있다며 시금치에만 젓가락이 다녀갑니다.
냉이하고 시금치는 서로 다른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했습니다.
냉이는 냉이의 맛으로 나를 위하고 시금치는 시금치의 맛이 있는 거잖아.
너무 어려웠을 것입니다.
비교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인데 그 쉬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라는 아빠가 지금은 불편하기도 할 것입니다.
엊그제 아침 묵상을 하면서 강이하고 있었던 일을 적었다. 이렇듯 서슴없이 내가 쓰는 글이 되어 주는 너에게 고맙다는 말은 언제, 어디에서 건네면 좋을까. 너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으냐.
밥을 계속 먹는 한 내가 쓰는 스토리는 저장될 것이다. 밥은 뱃속으로 스토리는 시선 속으로. 나는 혼자서도 먹고 너희와 같이 밥을 먹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습관이 된 탓에 늘 듣고 있을 것이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 산처럼 강처럼 흘러들고 스며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지런히 키우고 싶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고 나면 총총히 땅을 갈고 어서 거름을 주고 씨도 구해서 골고루 심을 것이다. 보리도 자라고 밀도 자라서 먹을 것이 되면 빻고 갈아서 곱게 가루도 낼 것이다. 때를 맞출 것이다. 너희를 맞이할 것이다. 이야기를 다 쓰고 오래 기다릴 것이다.
나는 어느 날은 면이 되고자 한다.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맛있는 소리가 처마에서 풍경으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