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세 시간 넘게 오는 동안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남편이 6.25 전란 통에 죽고, 여인 혼자 어린 자녀들을 키웠다. 여인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선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어?
네, 맞습니다.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파스카 성삼일´의 시작입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써왔던 흔적이 제게 남았습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에 뚫린 손바닥을 제자에게 보이십니다.
흔적은 증거로써 말하기보다 깨달음이 될 때 그 가치가 한없이 커집니다.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거나 볼 수 없던 것을 보는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다만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한 날의 행복´ 거기 나오는 저 장면이 저를 감싸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든 나를 통해서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것들, 그것들에 빛이 영롱합니다.
생각이 없었다면 생각이 묻어나고, 이미 있었던 생각은 자리를 내 저를 거기 앉힙니다.
예전 같으면 무엇이 떠올랐을까요?
예수님께 발만 아니라 손이며 머리까지 씻어달라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 말없이 아내의 손을 쥔 남편의 손길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남편이 맞잡은 손 안에는 가난한 날의 행복이 가득 들어 있었다.
떠올리는 것으로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모습을 갖추고 모양을 이룹니다.
그 형상은 무엇인지요.
안과 밖은 같아지고 있는지요.
세월이 우리에게 묻는 말은 그거 하나인 듯싶습니다.
얼마나 가까워졌느냐, 얼마나 일치하느냐.
네가 아는 것과 너, 네가 믿는 것과 너는 같으냐, 네가 가는 길에 너는 있느냐.
복음을 읽고 질문이 생기고 다시 복음을 읽고 그 질문에 답이 달립니다.
문제 안에 답이 있으며 답 안에 문제가 동동 사무칩니다.
그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음악을 모르는 제가 헨델의 메시아를 듣습니다.
1741년에 헨델을 통해 세상에 나와 사순절에 맞춰 연주되었던 그 곡들을 듣습니다.
´할렐루야´를 듣고 있으면 전장 戰場에 나가는 용사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복음으로 음악을 더 잘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福音인가 합니다.
착하다거나 복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선하다거나 복되다는 뜻도 아닙니다.
십자가인 것을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아내가 어느 날 묻습니다.
하느님이 이해가 안 되는 때가 훨씬 더 많다고.
저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나는 온통 이해되지 않는 것들 천지 天地인데 나보다 낫다고 그랬습니다.
나는 나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보다 제가 더 열심히 복음을 읽는 편입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 요한 13:14
글을 읽을 때 다 편안하게 읽더라도 한 곳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기 어려울 때에는 ´~해야 한다´를 따라가야 합니다.
거기에 말하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뜻이 계명이 되고 깨달음이 되며 말씀이 됩니다.
오늘 묵상을 쓰고 있으니 휴대폰에 날짜 하나가 뜹니다.
´마트 사장님 기일´
오늘이 그날이었습니다.
날짜는 쉬 돌아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웃음을 기억하는 일.
봄비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오선지처럼 연주했던 날이었습니다.
헨델의 곡을 눈으로 봤던 하루였습니다.
새벽부터 이렇게 마음이 무량 無量해서야, 종소리라도 울릴 듯합니다.
사람이 울림통이 되는 것 같아, 기도라도 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