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 마태오 28:8
여자들은 ´다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
´죽었던´ 어딘가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는 죽음은 일시적이거나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셀 수 있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은´이 계속됩니다.
말하자면 ´죽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죽음은 지속적이고 그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죽음, 그 변하지 않을 사실이며 현실을 ´다시´ 살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감격은 무엇으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다시´라는 그 기회, 그 시간, 그 공간을 만지고 보고 살아가는 지혜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습니까.
담백하다는 것은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뒤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내 맛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 올 것과는 상관없이 나 자신, 내 고유의 맛을 간직하는 일. 그 맛이 물이든 불이든 풀이나 철이라고 하더라도 한껏 담백할 줄 알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어떤 일로 인해서, 그쪽으로 가기보다는 ´다시´라는 말이 내게 있기에 스스로 풀어보는 방정식 같은 삶.
문제가 틀렸든 맞았든 그 상황과는 별개로 내게 남아 있는 ´다시´라는 시간이며 공간이며 기회를 내보이며 웃어보는 일.
종교는 선함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수행이 따르지 않는 선함은 허공을 가르는 유성 같습니다. 촘촘히 어디서나 반짝이는 별빛이야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길 안내가 됩니다. 선한 것은 한순간 빛을 내고 훌쩍 사라지는 환상 같은 것, 꿈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다시´를 허락해 주는 또 다른 벗입니다. 종교가 내 벗이 되고 그 벗은 나를 ´또, 다시´ 기억합니다.
나를 피곤해 하지 않는 예수님을 봅니다.
부활하신 모습이 상냥하십니다. 하지만 어디 그 모습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시는 길은 다시 월요일이며 다시 전도하는 여행입니다. 핍박과 설움, 채찍질과 가시관이 다시 뒤를 따를 것입니다. 누구는 침을 뱉고 그 옷을 갖겠다고 내기를 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려와서 너나 구해보라며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길을 가십니다.
돌아가지 않고 영리하지도 않게 또 가십니다.
다시 쌓는 선함은 신비를 품습니다.
이번에는 길가에 나있는 풀들이 먼저 경배합니다. 먼저 엎드리고 먼저 몸을 일으키며 주님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10
사람이 사람한테서 가장 괴롭고 가장 행복해집니다.
괴로울 때와 행복할 때 무엇이 ´다시´ 자라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사제는 사제에게, 수녀는 수녀에게, 제자는 제자에게, 나는 나에게 선이며 불행입니다.
´다시´
그 얼마나 보배로운 순간입니까.
부활은 ´다시´
다시 예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