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얇은 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다 보면 우유 표면에 생기고, 비누칠 할 때도 거품 위로 막이 볼록해집니다. 비 오는 날 어김없이 도로 한쪽으로 흐르는 빗물 위로 기름막이 동동 떠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피막 被膜이라고 그러면 저 같은 사람에게는 보호라든지, 방어, 방지와 같은 말들이 연상됩니다.
피막은 덮개가 되기도 하고 껍질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저녁에 일을 하는 입장이어서 낮 시간을 이용해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몇몇 반가운 얼굴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격조하며 지내고 있어도 젊어서 맺은 인연들이라 구수한 숭늉을 한 그릇 먹은 것처럼 금방 안온해지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어디 사느냐, 어떻게 지내냐 등등 궁금한 것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니까 어김없이 대학 시절 이야기가 끼어 앉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를 듣는 재미가 솔깃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과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 사이를 유유히 유영하는 나이가 된 듯도 싶어 편했습니다.
제각각 ´어떤 모습´ 하나씩을 간직하고서 - 마치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 예전의 ´그´를 재생시켰습니다.
사람들의 재생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니, 차원이 달랐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최대한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거의 똑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 재생이라면 부활은 전면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며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숨을 쉬는 생명 활동이 거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낚은 고기를 드셨습니다.
´막´이란 말을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A라는 사람하고 사이가 별로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는데, 우연히 A에 관한 이야기를 거기 앉아 있던 누군가에게 듣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너를 잘 모르는데 A를 만나면 항상 네 이야기를 좋게 하더라. 뜬금없으면서 열없는 찰나가 스칩니다. 접대용 멘트라고 하기에는 내가 그럴 만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오래 형성하고 있었던 막이 펑 사라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다음에 A를 어떤 식으로 봐야 될지 흥미로워지는 것이 인생에서 즐길 게임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여전히 막을 치고 그것으로 대하는 관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다 알 수 있으며 또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조금 섭섭하더라도 영 아쉽지는 않을 만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
짧은 글 솜씨로 이렇게 상을 차렸습니다.
찬 없는 밥이지만 시장기만 속여 두세요, 그런 쪽지를 저도 여기에 놓아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