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미터는 됐던 거 같습니다.
거기까지 공이 닿을 리는 절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막내 동서와 마주 보며 캐치볼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살짝 내리막이 져서 그랬던지, 하필 그 순간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습니다.
리듬감 있게 어깨가 돌아간다고 느끼면서 공을 던졌고 그 뒤로 공간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야구공이 너무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그 자리에서도 보였습니다.
땅에 떨어진 야구공이 튀어 올라 막다른 담을 때리고 그 앞에서 놀던 아이를 맞혔습니다.
돌보다 단단한 공에 아이가 맞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리가 굳는 것 같았습니다.
동서가 먼저 달려가 상황을 확인하는 듯했고 곧이어 구급차가 도착했으며 아이는 금방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저는 아이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후회됐습니다.
여기에서 절대 캐치볼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힘껏 던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아이는 하필 거기 있었던 거야.
하늘이 파란 것도 원망스러웠습니다.
함께 공을 주고받던 막내 동서의 얼굴에도 무거운 그늘이 졌습니다.
마침 잘 아는 후배의 아이라고 그랬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을지요.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아이가 실려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15
마침 여기까지 아침 묵상을 적었는데 7년 된 노트북이 작동을 멈췄습니다.
첫 문장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다시 전원을 넣고 첫 줄부터 쓰려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아니면 제멋대로 아침에 쓰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이 나왔습니다.
´´좋은 일´ 하는 데도 컴퓨터가 협조를 안 하네.... ´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심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박해와 수난, 순교의 역사가 교회에는 있습니다.
사명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선 기분을 철창 안에 갇혀 있던 호랑이가 바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더라고 어느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전에, 제가 쓰는 전법은 대부분 이 하나로 통합니다.
´그러기 전에´ 일어나고, 쓰고, 전합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다른 무엇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유유히 여기를 지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입니다.
아이가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고, 공을 던지기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역시 푸른 하늘이 좋습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던지요.
꿈이었구나....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꿈같은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애틋해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