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357

아침에,

by 강물처럼

아마 두 가지 반응일 것입니다.

아침이면 도착하는 이 메시지에 반응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두 가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 쓰지?


언제까지 쓰려는 거지?




몰랐었는데, 사실 ´대답´은 늘 달라집니다.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대답이든 사랑이든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이라면 그 모양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것을 바뀌었다고 해야 할지요, 변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요.




그리스 신화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인간과 신들이 한 데 어울려 난장 亂場을 여는 곳입니다. 시끌벅적 육자배기 한바탕이 질척하게 펼쳐지는 마당입니다.




거기 시지프스가 있습니다.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던 그가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그러고 있습니다.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구르고, 시지프스의 형벌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깝게 세상을 떠난 카뮈는 그의 부조리로 시지프스를 달래고 있습니다. 카뮈마저 시지프스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둡니다.




처음에는 여기에서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감 感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와 다릅니다. 지금은 어디서든 멈출 수 있습니다. 물론 그때도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다릅니다. <하는 데까지 하고> 그 말을 ´사는 것´, 그 말에 ´힘을 주는 것´이 사람의 일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부조리한 것이 우리의 본성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해 그러고 있습니까. 사실 그럴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모든 가치는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길을 나섰다가 결국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원점 회귀야말로 삶이 그리는 그림입니다.


용수철을 실컷 늘리면 더 이상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돌아올 거리에서 우리는 돌아옵니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탄성 彈性은 작용합니다. 탄성은 움직임이며 회복력이며 살아있다는 신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탄성 歎聲을 자아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그래서 그게 부조리하지만 사람은 그렇게도 살 수 있습니다. 공들여 산다는 말을 풀어서 쓴다면 아마 그와 같을 것입니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목적지가 있으면서 없습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목적지가 있으면 가까운 길을 찾고 편한 길이 좋습니다. 목적지가 없으면 불안하거나 자유롭습니다. 모두 가볼 데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가볼 것도 없는 것 같아서 헛웃음도 나옵니다. 시지프스는 아마 그렇게 웃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혜로웠으니까요.




저는 바위에 집중하는 대신에 시지프스에 시선을 둡니다. 길에 시선을 다 빼앗기지 않고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지우고 계시나요, 얼마나 가벼워지셨나요.




바위가 구르면 닳습니다. 사람은 닳지 않고 죽습니다. 죽을 때까지 닳지 않은 것은 부조리합니다. 사람이 잘못 쓴 것들을 지우개가 제 몸으로 지우며 저는 닳습니다. 잘 쓴 지우개는 그만큼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집니다. 대신 나를 성장시킵니다. 그만큼 나는 옳아졌습니다. 매일 산에 오릅니다. 그 산은 시지프스의 산이며 지우개가 지우는 산이며, 기도하는 산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 요한 16:21




먼 옛날에 누군가 아이를 낳아 길렀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기릅니다. 먼 훗날에도 아이를 기를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시지프스입니다.


그러니 저는 웃겠습니다.


내 탄성은 그것입니다.



*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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