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신화는 결국 물방울 이야기였습니다.
끊임없이 똑똑 떨어지는 물에 바위가 뚫립니다. 망치나 정, 드릴로 뚫는 구멍은 바위를 상하게 합니다. 바위 모양은 좋아졌을지라도 바위라는 이름을 그 순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물로 생긴 틈은 다릅니다. 그것은 길이 됩니다. 가치가 달라집니다. 물도 높아지고 바위도 높아져서 다른 격 格이 됩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는 길이 거기 있습니다. 공 空, 하얀 구름 너울 쓰고 봄이 오는 길,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노을 길, 내 발자취가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될 수도 있으니 눈 덮인 들판도 함부로 걷지 않는 그 길이 바위에게 생겨납니다. 공 空으로 만들어진 것은 상처 주지 않고 상처 입지 않습니다. 공간을 갖습니다. 공기가 생겨납니다. 공허한 것은 하나의 덕이 됩니다. 십자가에는 색 色이 없습니다. 원망과 분노, 저주를 담고 있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내 십자가와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에서 다릅니다. 내 십자가는 불쾌함을 가리느라 네온으로 반짝거립니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그것을 내내 굴리고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를 둘러멘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루카 24:49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공 空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색 色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그 길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바로 종교입니다.
내비게이션도 성능이 좋은데 지도 보는 법을 가르치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 종교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무엇입니까.
토요일이니 이런 묵상 어떨까 싶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온몸이 곪은 나병 환자였다. 그가 말했다.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부디 저의 죄를 소멸해 주십시오."
달마가 답했다. "그럼 너의 죄를 내놓아라. 내가 그 죄를 없애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