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은파 銀波를 기다렸습니다.
나의 에피타프 epitaph는 저것입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둘 중에 하나를 덧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문장을 완성시킬 마지막 자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모든 스토리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로 끝나든지 그러나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뭐, 그런 말은 뱉어본 적 없습니다.
세상은 매일 결정하는데 나는 머뭇거립니다. 무엇이든 죽이지 못하면 결정하지 못합니다.
decide [di´said]결정하다, (공식적인·법적인) 결정[판결]을 내리다.
-cide 1. <죽임, 살해의 뜻을 나타냄> genocide 종족 학살
2. <살인자나 무엇을 죽이는 데 쓰이는 사물을 뜻함> insecticide 살충제
우유부단한 것이 병 病인 줄 알았습니다. 약점이었으며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저 단어를 알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흘러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정했습니다. 나도 살고 세월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다렸던 거 같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파, 하얀 파도는 무엇일까요.
하늘도 호수도 다 파랬습니다. 나무들은 잎이 무성했으며 바람은 흔들렸습니다. 조용한 오후, 호수 앞에서 호수 속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고래가 한 마리 솟아나도 좋을 거 같은 한가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나서 고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난해졌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아니, 또 흘렀습니다. 높고 낮은 데로, 높고 낮은 대로 출렁거렸습니다. 굽이를 만나면 휘어졌고 벼랑에서는 추락했습니다. 언덕은 올랐으며 비탈에서는 가만 내버려 뒀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노을이 졌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새벽에는 오래된 모과나무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왔습니다. 잘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요한 17:21
그 노래를 듣습니다.
나는 그 시절을 살지 않았는데 거기 어딘가를 지나온 것만 같아서 가만히 듣습니다. 늘 같은 마음으로 늘 같은 봄날이 갔습니다. 6월에도 10월에도 1월에도 봄날은 가고 있었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오늘 군대에 갑니다.
청량리역에서 아침 일찍 기차에 올라타고 춘천에 갑니다.
점심도 먹지 않고 102 보충대 앞에 흐르던 개울을 바라보다 툭툭 털고 일어나 군인이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늙기로 마음먹었던 날부터 얼마나 지나왔는지 꼽아보는 일이 성가실 때도 있습니다. 어제 문득 알아봤습니다. 나 대신 죽은 것이 봄날이었구나. 다 살지 못하고 떠난 너였구나. 연분홍 치마를 휘날리면서 돌아왔습니다. 다시는 죽이는 일 없을 거라고 열 번을 그리고 스무 번 더 쳐다봤습니다. 우물 속에 어쩐지 미운 사나이*,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리워지는 그 사나이를 추억처럼 꺽꺽 들여다봤습니다.
* 윤동주의 시, 자화상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