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7-1

둘레길 6코스

by 강물처럼

2022, 1010, 월요일


창백한 얼굴입니다. 비가 그친 창밖 풍경이 쌀쌀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물기가 가득합니다. 흐르지 않고 담겨 있는 물은 거기가 어디든 그것이 무엇이든 깊은 표정을 짓게 합니다. 아스팔트 어깨가 무거워 보이고 아파트 옆구리도 우울해 보입니다. 날이 밝았어도 꿈적하지 않습니다. 돌아누워서 한 번 깬 잠을 다시 이으려고 합니다. 이불이라도 덮어야 하는데 축축한 바닥에 그대로 말이 없습니다. 일요일 같은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늘은 흐립니다. 거기에도 물기가 아직 남았습니다.



아이들 시험도 얼추 끝났습니다. 지금입니다. 동남쪽에서부터 맑아지는 하늘을 마중하기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6개월 전에 봤었던 수철 마을, 거기에서 봤던 봄이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합니다. 지막을 지나 평촌, 바람재에 오르는 길입니다. 1년에 겨우 두 번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모두 함께 걷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저한테는 그것이 또 중요한 일이어서 오늘 같은 날에도 가보는 것 같습니다. 정기 적금은 아니고 틈나는 대로 모으는 쌈짓돈 같습니다. 지리산 길을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 왠지 어울립니다. 시간에게 장난을 거는 듯합니다. 지리산에 오면 그 느낌에 빠집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은 내가 몇 해 전에 걸었던 길입니다. 저 혼자 걷는 둘레길은 완주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나는 앞에서 걷고 또 하나의 나는 뒤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이나 길이 저를 알아볼까 재미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아보는데 말입니다.



이 편지는 조금 늦게 도착하겠습니다.


아마 숨이 가빠지는 곳일 겁니다. 멈춰서 그때 생각날 것입니다. 좋은 곳에 가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요. 미안하지만 제가 좀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계속 쓰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까지 저는 몇 번이나 그 카톡을 울린 사람인지요. 제가 보낸 편지는 얼마나 되었는지요. 성경은 모두 편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저도 그것을 옮겨 적은 것 같은 기억입니다. 산에서, 오늘은 지리산에서 보낼 겁니다.



출발하면서 좋은 시 한 편 적겠습니다. 얼마 전 소개했던 섬 시인, 이생진 시인입니다.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더라도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그 약속을 오늘 차곡차곡 지켜볼까 합니다. 약속은 한 번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잊지 않으면서 지켜가는 것인가 봅니다. 돈을 다 갚고서도 고마움이 내내 남는 것, 그런 약속이 약속인 듯싶습니다. 날이 따듯해지고 있습니다. 햇살이 길게 기지개를 켭니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바람재에서 뵙겠습니다.

여긴 바람이 곧잘 불고 있습니다. 아침에 떠나온 그곳은 해가 났는지요. 가을꽃들도 많습니다. 살살 잘난 체를 하고 싶게 만드는 꽃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가 나란히 길에 피었습니다. 벼는 이 산골에서도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밖에 나와서 이렇게 다니면 이것이 행복이다 싶습니다. 산청은 지금 한참 약재 축제가 물이 오른 듯합니다. 지리산 둘레길 6코스는 산청을 지나갑니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는 경호강, 사방으로 산이 펼쳐진 속에서 잠시 앉아있습니다. 바람이 서늘합니다. 금방 일어서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