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6코스

by 강물처럼

비가 내리고 날은 추웠습니다.

´만사가 모두 불비 不備 했는데 오직 동풍만이 있었습니다. ´


적벽에서의 일전을 앞두고 오나라 장수, 주유는 불화살을 쏠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만사가 모두 갖춰졌는데 오직 동풍만이 부족하다. ´



그대로 집에 머물기에는 겨우 얻은 하루짜리 여유라서 조바심이 났습니다. 날씨만 좋았으면 일요일 오후 늦게라도 출발할 요량으로 짐도 꾸리고 기다렸습니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있던 아이들도 늦지 않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곧 어두워지니까 오늘은 집에서 잠을 자자, 내일 아침 일찍 하늘을 보고 다시 정하기로 했습니다.




전국의 구름 사진을 보고 날씨 예보를 찾아봤습니다. 동남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도 비가 내리면 차나 마시다가 오자, 싶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챙겼습니다. ´바닥´이란 말이 가끔 좋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그러면서 일어서는 사람을 저는 응원하는 편입니다.



가을이 정들기 시작한 모습이었습니다. 벼는 다 익었고 그 노랑은 늘 사람을 안심시키는 색입니다. 황금이라고 불러도 좋은 벼 이삭이 넘실대며 주렁주렁 달린 감을 넘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기야 가을빛을 그대로 품에 안은 주홍색은 가을이 끝날 무렵에는 그 실핏줄이 다 보일 것처럼 투명할 것입니다. 속살을 울긋하고 불긋하게 가꾸면서 깊은 추색 秋色을 겹겹이 동일 것입니다. 아서라, 볏님들아. 그대들은 하나의 무리 群로 하나의 장수가 되어라. 사람의 뱃속을 살찌워 나를 구하고 너를 구하여라. 보시 布施 하여 우리는 서로의 먹을 것이 되기로 하자. 나는 땅을 아끼고 너는 나를 아껴 우리 오래 마주하기로 하자. 겨우 노란 수컷들을 달랬습니다. 감나무의 감들은 조용히 붉어졌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여섯 번째 코스. 거기는 짧았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마침 좋은 날이었습니다. 가욋길을 한 십 리쯤 더 걸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평지에서 평지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많이 걷는 길입니다. 그렇더라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경호강이 젊은 청년처럼 곁에서 흐르고 있으니까요. 파랗다가 깊다가 넓어서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강이 흐르는 곳은 어째서 사람을 연주할 줄 아는가. 하마터면 시를 쓸 뻔했습니다. 어제도 그 길에서 손뼉을 쳤습니다. 돈 안 들이고 짓는 것들이 좋은 거다. 나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처음부터 이 땅에 있었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는 병풍처럼 지리산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경호강이 늘씬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을은 내일 더 원숙해질 것입니다. 아내와 걷는 뒤로 산이와 강이가 따라옵니다. 온전히 자연 속에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이 소중한 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것도 몸에 힘이 좀 빠져야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몸에 힘이 좋을 때는 다 이기려고 합니다. 지금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것을 본받아야지 싶습니다. 아니면 이기고도 지는 것은 또 어떨까 싶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지는 것이 환한 것 같습니다. 불꽃처럼 말입니다. 지는 것은 사그라들고 엷어지고 희미해지는 일, 그리고 씨가 되는 일. 내가 지면 씨가 남았으면 싶습니다. 길에서 성당을 만나면 부처님을 뵙듯이 손을 모읍니다. 성심원에 성당이 있을 줄은 그 앞에 설 때까지 몰랐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도 파랗고 나도 파랬습니다. 파란 날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대성당은 넓고 고요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달과 별이 꽃처럼 피었습니다. 햇살이 그 뒤에 서 있으니 그림 속의 그림들이 짓이 나서 성당을 온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요하지만 적막하지 않은 것이 성당 안에는 있습니다. 거기 앉아서 십자가를 바라보다 나왔습니다. 무슨 말도 들리지 않았고 무슨 말이 들렸습니다. 그것이 종교인 듯합니다.

성당 앞 느티나무 아래서 기다리는 식구들에게 한 사람씩 들어가 앉았다 오는 것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선선히 따라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족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성당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산이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5분이 지났는데도 안 나오는 것이 궁금하게 했습니다. 잘못한 것이 많나? 강이가 던지는 말에 다들 웃었습니다. 맑은 표정으로 산이가 나오고 강이도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을바람 하나가 빙글빙글 맴을 돌다가 나뭇잎을 쓸었습니다.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강이는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피아노 있는 데도 가보고 고백 성사 보는 데도 봤고, 앞에까지 가서 십자가도 자세히 봤어, 성당이 넓네!"




우리가 속으로 했던 것들을 강이는 눈으로 대신 다 하고 나온 듯합니다. 그것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럽니다.




"유리창에 있는 그림들이 너무 예쁘더라."




그렇게 해서 12. 2킬로미터를 마쳤습니다. 다음 코스는 12. 6 킬로미터짜리입니다. 또 오자는 말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자는 말이 우리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길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없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겨우 몇 군데 다녀봤습니다. 우리가 함께 걸어본 길은, 그야말로 우리 삶에 ´동남풍´이 되어 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