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4-1

놀래라

by 강물처럼

2022, 10,19, 수요일


생각만 하면 웃기는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열없게 웃음이 나옵니다.

옆집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정도입니다. 어린이집 다니기 시작한 그 집 아이, 진우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 아이 때문에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많이 컸네, 잘 생겼다! 그렇게 말입니다.




딸아이를 마중하러 나섰습니다. 서점에 들렀다가 학원에 가야 하는데 다른 날보다 더 늦는 것이 아무래도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마침 엘리베이터 위에 17이란 숫자가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옳거니, 이제 오나 보다.


방금까지 왜 이렇게 늦냐며 혼자서 툴툴거리던 것을 다 잊고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가능한 보이지 않게 몸을 낮추고 자세를 취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하고 손가락을 가능한 크게 벌려서, 문이 열리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17이라고 보였으니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이 1초 간격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사람은 옆집 진우 아빠였습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순발력이 떨어진다는데 그 말을 실감했습니다.


아, 강이가 아니구나, 까지 생각했던 것도 같았습니다. 진우 아빠도 평소처럼 고개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00% 완벽하게 강이가 올라온다. 완전히 깜짝 놀래야겠다, 그 생각으로 온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강이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마치 빙판길에서 차가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속수무책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건 내 의지하고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앞으로 퉁겨져 나가는 무릎 반사 같았습니다.




´왕! ´




덩치가 저보다 좋고 쌀쌀한 날씨에도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쓰레기라도 내다 놓고 온 모습이었습니다. 하필 오늘은 쉬는 날이었던가 봅니다. 전혀 마주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끼리 서로 마주친 것입니다. 겸연쩍게 인사를 나누던 사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코믹한 모습으로 잠시 정지 상태에 빠졌습니다. 진우 아빠는 많이 놀랐습니다.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어쩌다가, 왜, 옆집 아저씨가, 이럴 수가, 도대체, 뭐지? 한순간 스치는 그 만 가지 표정이라니요. 저 또한 놀랍고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창피하고, 이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아 뭐냐?




´우리 딸인 줄 알고, 아이고 미안합니다. ´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웃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웃음이 그치지 않는 것이 더 웃겼습니다. 그 덩치가 펄쩍 뛰면서 무방비로 놀라던 모습은 꽤 오래갈 것 같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오늘은 롤 케이크라도 하나 사야겠습니다. 그런데 강이를 대신시킬까 싶습니다. 혹시 웃음이 나오면 어쩌지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많이 받았습니다.


많이 요구하시는 것을 알겠습니다.


더없이 고마운 것은 ´선뜻´이라는 마음입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렇게 됐는지요. 그렇게 건네주고 싶어 집니다. 가을이어서 더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