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 길상호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엔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어둠이 스며든 말은 부러 꺼내지 않았네
그저 날개를 쉬러 돌아가는 새들을 따라
먼 곳에 시선이 가 닿았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이름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돌아서야 했던 역, 당신의 저물녘
어느 역에서 만날지 묻지 못한 실수를 날마다 감수하며 산다
그때 거기에서 꼭 필요했던 말은 하나였을 텐데 그 말을 못 한 채 여태 고쳐 쓴다
자꾸 벗겨지는 신발이 귀찮아 벗어놓고 거기까지 걸어가 보기로
내가 찾는 역이 맞기나 하는지, 해 뜰 녘부터 해 질 녘까지 다시 적어 본다
어슬녘이란 역에서 너와 닮은 사람을 스치며 내가 찾는 것이 역인지, 너인지 잊었다
나는 '녘'이란 네 말을 알아듣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길도 잃고 역도 잃고 이참에 이름도 잃어버릴까 싶다
북극성처럼 남아 있는 얼굴 하나가 신발이 없어도 찾아갈 수 있는 거리니까
그것은 네가 가리키던 방향이었을지도 모른다
해가 지는 서녘으로 사라지던 너를 남녘에서 기다리는 잘못 같은 거
아니면 너는 시간을 내게 물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몇 시?같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면서 긴 말
저물녘 같았으니까, 사방으로 소실된 빛이 흰머리카락 한 올로 길어지는 표정 같은 거
방향이 없는 표정과 시간을 잃은 눈빛은 '녘'에 남아서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참혹한 현실 現實, 웃기지도 않은 비현실
비 오는 동틀 녘이었습니다, 같은 그로테스크하기로 마음먹은 우리들이 기다리는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