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6-1

친구

by 강물처럼

2022, 1021, 금요일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ㅡ 루카 12:56-57




위선자는 바로 저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위선자입니다.


무엇보다도 게을러서 더 큰일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내가 잘 모를 때는 그 사람들에게 묻고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무모한 사람인지 그리고 대책 없는 사람인지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꼭 읽으셨으면 합니다. 그중에 한 페이지를 여기 옮기겠습니다. 저도 옮겨 적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보고자 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선택들, 그러니까 자동차를 만들고, 냉장고를 사고, 더 좋은 옷을 지어 입고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좋은 일들이었지만, 과연 지구에게도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1960년대에는 인류가 사용하는 자원과 에너지가 지구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양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에는 지구 하나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양이 모두 필요하게 됐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지구 하나로 부족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구 1.5개에 해당하는 에너지와 자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몇 개입니까? 우리가 지구를 복제해 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지구는 하나뿐이고 복제해서 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뿐인 지구´에서 지구 1.5개와 맞먹는 에너지와 자원을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매월 100만 원 버는 사람이 150만 원씩 쓰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은행이나 친구, 가족 등 누군가로부터 50만 원씩 빌려 쓰면 되는 거니까요. 지구 0.5개는 누구에게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 다음 세대입니다. 저희 세대는 여러분 세대에게, 여러분 세대는 앞으로 여러분이 낳을 아이들 세대에게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여러 개라면, 앞선 세대가 다소 풍족하게 쓰더라도 다음 세대의 몫이 어느 정도는 남을 겁니다. 그러나 지구는 딱 하나입니다. 지구가 하나라는 것은 제가 쓰면 쓸수록 여러분의 몫이 줄어든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쓰면, 그다음 세대의 몫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우리 세대가 빌려 간 0.5개의 지구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는 거죠?




- 안병옥,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지은 지 10년쯤 지나면서 아파트 - 특히 저층에 사는 세대 -에서는 하수 역류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건네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물이 거실까지 흘러들고 소파며 가구까지 적시는 일이 벌어집니다. 집주인은 당황하다가 황당해하고 마침내는 분노합니다. 왜? 우리 집이 그러는 거냐며 하소연합니다.


말하자면 동맥 경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혈관이 노화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욕망´이 쏟아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콜레스테롤이 혈관에 달라붙듯이 먹다 남은 삼겹살 기름이며 생선 굽다 남은 기름이며 라면 찌꺼기들이 부지런히 하수관 벽에 침착하면서 그 속을 좁혀온 것입니다. 혈관이 막히면 혈액 순환에 장애가 생기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달려가고 미리미리 약을 챙기고 운동이며 식습관을 바꿉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대충´ 살아갑니다. 대충 사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불안을 잉태합니다. 그리고 어딘가 터지거나 막히거나 거꾸로 쏟아집니다. 거기 사는 사람은 ´날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누구 잘못인지 모를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모든 아파트 건물은 그 위험을 날마다 감수하고 있습니다. 우리 라인에 사는 사람들이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 가격이 사람의 수준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초동의 아크로비스타는 역류 정도는 저절로 해결되는 시스템이라도 갖췄는지 궁금합니다.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학생이 중간시험에서 100점을 맞으면 우선 그 학생의 노력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회사에 나가서 일하고 어머니가 너를 태워서 매일 오고 갔던 그 길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해줍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아주 오래전에 너를 위해서 함께 길을 건너 줬던 어떤 아주머니나 길에 넘어진 너를 일으켜 세웠던 어떤 할아버지도 거기에 함께 있다고 말해줍니다.




¶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 홍순관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의 완성을 위해서도 많은 것들이 힘을 합치지만 하나의 실패에도 그만큼 많은 것들이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하수관이 막히는 현상 하나에도 벌써 오래전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코스가 마련되고 있다는 자각이 급기야 우리에게도 필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순간에 이기적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하던 대로 했을 뿐이고 다른 사람들이 지내오던 대로 지냈던 것인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빵을 사러 가서도 눈을 흘기는 직원을 만나고 돌아옵니다. 두 번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백 번 넘게 그 말을 반복하겠지만 그래서 싫겠지만 한심하다는 듯이 고객을 내려보는 것은 아니지요. 그 중간쯤 되는 지점이 자꾸 깎여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그 중간 어디쯤,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보이고 고맙게 느껴지고 그래서 좋아 보이는 거기 말입니다.




권리와 의무가 어울리며 춤을 추는 공간은 더 이상 꿈인가. 여직원의 권리와 의무를 보호하고, 아파트 주민의 권리와 의무가 알맞게 배합된 반죽을 상상하는 일. 선생님과 학생의 권리와 의무가 서로 맞서지 않는 교실, 우리가 갑질이라고 하는 것도, 환경오염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말들도 모두 거기에서부터 단추를 다시 채워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어라."


더 큰 실패나 비극을 막기 위한 처방전인 듯합니다. 2천 년 전에도 ´위선자들아! ´ 외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나는 잘하지 못했어도 내 다음에 오는 사람은 나보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도 예수님 닮은 마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오늘 복음 말씀에 친구*합니다.



*친구 親口 -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서적이나 성물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을 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