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7-1

전혜린

by 강물처럼

2022,1022, 토요일


¶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싯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싯구? 하긴 바하만도 바흐만이라고 적어야 할 거야. 그래 나도 ´싯구´가 더 마음에 든다.


민서 출판사에서 1992년에 나온 책에는 ´아뭏든´으로 쓰여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대로 적을까, 바꿔 적을까. ´아뭏든´은 이제 어색한 글자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꽤나 난이도 있는 글자여서 아이들 받아쓰기에도 종종 등장했을 터인데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글자 하나를 바라보면서 또 해찰을 부립니다. 아마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내 생리도 전혜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전혜린의 꿈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길을 잃고 알 수 없는 먼 곳에 닿는 것 아니었을까, 오늘 아침은 빛바랜 그녀의 에세이, 116페이지 ´먼 곳에의 그리움 (Fernweh)´에서 시작합니다.




옛날 말투라며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먼 곳에의´ 그런 말이 어디 있냐며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도 ´일본식 어법´이라며 대통령의 연설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은 적절했다고 봅니다. 사람이 다 알 수는 없어서 누군가는 알려주고 누군가는 듣고 배우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변명할 것은 변명을 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옹이 진 것을 파고 들어내 그 속을 다시 채우고 메우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해지고 밝아집니다. 사람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make라는 동사를 배우는 순간부터 우리말은 일종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모든 말을 ´만든다´로 처리해버립니다. She makes me happy. 그녀는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찍 영어 문장에 노출된 젊은이들도 대부분 비슷합니다. ´한다´와 ´했다´는 무조건 do에서 시작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거기를 얼마나 잘 벗어나느냐, 어느 시점에 벗어났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말하고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이 그게 그거 아니냐고 오히려 따지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친구에게 어학은 늘 ´해도 늘지 않는´ 어떤 것이 되고 말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기자들이 쓴 기사에서도 그런 말은 자주 목격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로 충분한 것이 ´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치게 했다´라든지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make를 해석하고 싶어서 조바심을 내는 문장들이 우리에게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웃게 ´하는´ 그래야 할 것을 우리를 웃게 ´만드는´ 그러는 순간, 우리는 발이 땅에 묶인 채 날갯짓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언어는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맙니다. 법이 사람을 옥죄는 꼴입니다. 문법만 들이대고 따지러 들면 소위 ´법대로 하면´ 회전을 할 공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시간을 들여가며 그 공간을 깎아 먹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본어투의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주의하는 편입니다. 우리 법전에 있는 일본어식 표현은 이미 오래전에 공론화되었으며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많은 일본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결국 ´단어´ 정도에서 우리는 티격태격하며 불쾌해합니다. 그것도 너무 ´일본말처럼´ 들리는 일본말 앞에서만 그러는 것입니다. 쓰레빠, 소데나시, 와리깡, 다마네기, 벤또, 와리바시, 키마에, 쓰메키리, 등등.


그런데 영어를 배우면서 모든 영어 선생님들은 ´부정사´, ´동명사´, ´전치사´ 그러면서 가르칩니다. 사실 그 이름들도 한자로 쓰여서 그렇지 일본 학자들이 만들어 낸 용어들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전문 용어입니다. 그 말들은 일본어라고 일러줘야 합니까, 우리말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까. 너무 많은 것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겹겹이 쌓여 있는 현실입니다.


사실 문장으로 쓰면 더 많은 일본어식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실수하지만 조심하려고도 합니다. 조심하는데도 실수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개인의 탓인가 싶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스펙을 쌓느라 연애도 결혼도 포기하는 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말하는 것처럼 묻고 싶습니다.




전혜린의 꿈을 찾는 문장을 보고 길을 나섰는데 이렇게 해찰이 심했습니다. 한자로 쓴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따라서 써봅니다. 田惠麟.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알아서 뾰족할 수도 있고 아니까 둥글어지는 이치도 좋습니다. 뾰족해야 둥글어질 수 있으니까요. 다만 김인환 교수에게 배운 그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상대를 화나게 하지 말고 아프게 하는 비평´


그 말이 별처럼 내렸던 것을 알겠습니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반짝이니 말입니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일본어 ´の´에 대해서 적어볼까 합니다.


한 글자의 시를 적으라면 저는 아마 그 글자를 적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일본어지만 잊고 싶지 않고 저 혼자서라도 오래 써보고 싶은 글자입니다.




오늘은 먼 길 떠나신 친구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다가 부고를 전해 받았습니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안한 안식을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