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24, 월요일
그것이 무엇이든 흔해지고 나면 감동도 설렘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당연해지기 시작하면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것이 생겨납니다. 나는 아직도 돈가스를 처음 먹었던 날을 기억하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랐던 그 첫날의 풍경을 그릴 수 있습니다. 종로에 있는 교보 문고에서 모니터로 책을 검색했던 낯선 감정이 저 밑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매일 아침 컴퓨터 화면을 켤 때 떠올리곤 합니다. 흔하지 않았던 날들에 내가 겨우 해봤던 것들에 대한 기억들이 나라는 사람을 덜 심심하게 가꿔주고 있습니다. 결핍이 짓는 신비한 미소를 알아볼 수 있는 행운이 저에게도 한 잎 내려앉은 듯합니다. 희고 깨끗한 발로 걷고 싶다던 어떤 시인을 그대로 빌려다 쓰고 싶은 대목입니다. 돈가스는 수덕이 하고 먹었고 비행기는 길영이 형하고 탔으며 교보 문고에서는 눈이 예뻤던 여학생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해질수록 다른 쪽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찬바람이 부는 날에도 달려가고 푹푹 눈이 나리는 밤을 응앙 응앙 울면서 나타샤*를 찾아가는 듯 보입니다. 쓸쓸한 그림이 그나마 씁쓸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그를 멀리 내다봅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차를 한 번도 타지 않고 그저 걸어서 평생을 다 사셨는데 나는 하루라도 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 인류가 되었습니다. 내 차창으로 스치는 저 나무들은 열심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수덕이도 길영이 형도 눈이 예쁜 여학생도 흔하지 않고 세상에는 차들이 가득합니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차들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그 어묵국을 기억합니다. 오뎅국이라고 해야 맛이 나는 그 어묵국을 다 분해시켜서 어디에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요. 분자 하나하나는 공중을 떠돌고 내 몸속을 떠다니다가 어젯밤에 실로 오랜만에 저희들끼리 결합했습니다. 초신성이 환하게 터졌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차를 몰고 고사포 바닷가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혜영 씨´를 인식하는 방식도 시대에 맞춰 업그레이드해 놓지 않으면 오염될지도 모릅니다. 바이러스는 무서워졌습니다.
창기가 결혼을 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따뜻하게 계절을 보내던 무렵, 영기하고 나는 그 집 거실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밥만 먹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그래서 그렇게 밥 한 번 먹자는 인사를 주고받고 살아가는가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스물아홉이 안 되었고 혜영 씨는 창기가 ´각시´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새색시´라는 말이 듣기 좋은데 친구가 그렇게 부르는데야 도리가 없다는 엷은 체념도 있었던 기억입니다. 아마 처음은 아니었고 몇 번쯤 그렇게 어울려 저녁을 먹었으니까, 우리도 나름 구식이었으며 무던한 각시에 무던한 신랑, 무던한 신랑 친구들이었습니다.
어느 밤 차가운 바람 속에 먹었던 어묵국은 맛이 좋았습니다. 맑고 깨끗한데 묵묵히 속을 데우는 맛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요리조리 건더기를 들춰보며 뭐가 이 맛을 내는가 짚어봤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겨우 파 하나로 목을 타고 내리는 이 감칠맛을 낼 수는 없는데, 마침내 궁금해졌습니다. 그만큼 은근히 달고 짜고 매웠습니다. 생강이 겨울 무하고 맛이 어울리게 스미면 사람 혀뿌리가 행복해집니다. 사계절 동안 흙 속에서 수련한 기운이 달착지근히 입안에 남습니다. 여기 뭐를 넣었길래 이렇게 맛이 좋지요?
잘했다. 캠핑을 다닌다는 말은 반가웠습니다. 내 일처럼 듣기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래 그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창기가 손을 다치고 그 손으로 텐트를 치고 장작을 불속에 넣어가며 말없이 불길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평화를 나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각시´하고 둘이 밥을 해 먹고 고기를 굽고 노래를 듣는 바닷가에 달려갔습니다. 창밖에 스치던 나무들도 내내 잘 따라왔습니다. 저녁으로 들어서는 하늘이 어찌나 아프리카 하늘 같았는지 모릅니다. 오렌지빛이 층층으로 여울지는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새로 깔린 도로에는 가로등도 초원의 기린들 같았습니다. 나는 고운 것을 보러 갈 때 설렙니다. 흔하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는 고고학자가 되는 것 같고 인디아나 존스*에 나왔던 헤리슨 포드처럼 용감해져서 어둠을 반깁니다.
그때 ´오뎅국´ 정말 맛있었다는 말은 어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 김치는 그대로다. 그랬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먹었던 창기 어머니 김치 그대로다. 맛은 정말이지, 순결합니다. 흔한 것들의 세상에서도 홀로 청정합니다. 어머니가 건강하셔야겠습니다. 아들도 며느리도 그 아들과 며느리의 손자, 손녀도 어머니가 건강하게 담아주시는 맛 좋은 것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말이 산처럼 많아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울 수 있는 관계는 벗인가 싶습니다. 애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거울 같은 이가 있다면 그것은 친구 아닌가 그랬습니다. 열 살에 알았던 친구가 쉰 살이 넘고 더 지나면 할아버지도 될 것입니다. 금방 일어서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금방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금방´이었습니다.
*1938.3월 '여성' 3권 3호에 발표한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中
*이 시리즈를 빼놓고는 1980년대 문화를 논할 수 없을 정도의 당대 최고의 액션 모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