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25, 화요일
"아니오, 아직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궁금하셨던가 봅니다. 젊은 새댁이 끓인 어묵국이 얼마나 맛있었으면 그걸 여태 기억하냐며 의아해하셨습니다. 대체 무엇을 넣던가요? 맛은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고유한 유전자 같은 거 아닐까 그 순간 생각했습니다.
대답해 줄 수는 있어도 아마 다른 맛일 거라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맛´이라는 맛이 세상에는 있는 듯합니다. 맛은 시간과도 같고 인연 같은 거라서 한 번만 그 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 맛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 순간 - 친구가 신혼살림을 차렸고, 먼 데서 영기가 찾아왔으며,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반갑고 좋았던 감정, 무엇보다도 새색시로 남편 신랑들에게 좋은 인상을 건네고 싶어 하는 버선발 같은 하얀 마음, 그리고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저녁, 그 저녁을 비추는 안온한 불빛 아래. - 그 조합은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물아홉 살, 겨울이 시작할 무렵에 우리 네 사람은 오붓했던 것입니다. 평화로웠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잊히지 않는 ´맛´이 영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갖지 못한 인연들은 외롭습니다.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어떻게 먹느냐는 훨씬 값진 물음입니다.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 기억이 없습니다. 시상대 맨 위에 섰던 기억은 나를 위기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그거야말로 봄날의 꿈 아니던가요. 하루씩, 한 알씩 ´겨자씨´가 모여서 누룩이 부풀어 가는 일, 우리네 삶은 그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그것이 마땅합니다. 어머니를 여읜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 몇 글자 적었습니다. 상실의 시절에는 어떤 말도 어떤 하늘도 어떤 바람도 나부끼지 않겠지만, 세월만 가라시구려* 그 말만 짚어가며 살아가겠지만 따로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깊이는 넓이를 부러워하지 않더라도 늘 잊지 않고 세상을 펼쳐 본다. 그게 진정한 깊이다.
넓이는 깊이를 동경하고 때로는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느라 넋을 잃기도 하지만 그것이 넓이다.
어머니가 네게 보여준 삶은 깊이였냐, 넓이였냐.
네가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은 깊이냐, 넓이냐.... ´
반년쯤 지나서 그때 다시 어제 보낸 문자 메시지를 꺼내 앞에 놓고 막걸리를 따라 줄까 합니다. 친구에게는 어떤 맛이 나는지 먼저 한 수저 떠먹어 봐야겠습니다. 깊은 맛, 우러나는 맛, 환하게 번지는 맛, 기대됩니다.
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오늘도 그냥 지나가면 또 물어보실 것 같은데.
혜영 씨가 끓인 어묵이 하도 맛있어서 여기 뭐 넣었어요? 물었더니, ´별거´ 안 넣었어요. 그랬습니다. 별거 안 넣었다는 말의 바깥은 별거 아닌 것들은 몽땅 넣었어요,라고 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이 세월은 갔지만 여전히 혜영 씨는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별거´ 차린 것 없어요, ´별거´ 해준 것도 없고, 저 맛이 그 맛이었구나.
창기 부부가 옆에 앉고 산이 엄마하고 저도 거기 앉아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여자들은 태생이 분위기 메이커들입니다. 우리는 덤덤한데 그들은 어제도 만났던 사람들처럼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짧은 시간에 주고받는 말들이 남자들 1년 치는 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정보를 저렇게 나누는구나. 밥이 맛있었습니다.
오늘도 영 알기는 틀린 것 같다며 여기까지 읽다가 그냥 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묵국에는 든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청양 고추였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 건져내고 그 맛만 거기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새색시가 어디에서 이런 배려를 배웠을까, 서른이 채 못 된 나는 그것이 신선하고 고마웠습니다. 지금이야 흔한 기술일지 몰라도 그날 내가 처음 본 솜씨였습니다. 건져내고 맛이 나는, 그것은 ´ 없이 행하는´ 그윽함이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아스라한 옛일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98년 12월에 하지 못한 인사를 22년 10월에 전합니다.
다음에, 늘 우리들의 인사는 이렇듯 기약 없는 ´다음´밖에 되지 못하지만 이것도 ´별거´ 아닌 약속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다음에 혜영 씨 만나면 맛있는 거 드시러 가시지요.
잘 먹었습니다.
*김소월, 못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