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밥상머리 17

김밥이 좋지

by 강물처럼

토요일 아침 7시 반.

회사도 학교도 다 잊고 단잠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을 시간이다.

날씨도 한층 선선해진 초가을이어서 여름에 맛보지 못한 달콤함이 묻어있는 이부자리,

그 이불을 덮고 깔고 세상 편한 모습들이다.

그 아침을 가로질러 우리 집 앞에 찾아온 우진이 아빠와 잠에서 깬 모습 그대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나는 포도 3송이를 종이봉투에 넣었고 그는 김밥 3줄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 집 김밥을 우리 우진이가 엄청 좋아해서요, 마침 몇 줄 안 남았더라고요."

금요일 저녁에 안부를 묻는 전화로 혹시 내일 아침 김밥 사러 갈 것인데 어떠냐고 물었던 참이다.

김밥, 반갑고 재밌고 맛있고 다정한 이름.

여름에는 김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혼연스럽게 먹은 것을 소화시킬 줄 아는 모양새가 아니어서 피하는 것들이 많다.

말했듯이 나는 없다. 위대한 위 胃.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입에서 씹은 것을 속으로 넘기면 그것을 위가 다 받아낸 뒤에 위액을 섞어서 오랜 시간 몽글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쳐 소장과 대장으로 지나면서 소화라는 것이 완성되는 것.

가늘고 고운 밀가루도 체에 걸러 내면 더 연하고 보드라운 가루가 된다.

입자가 가는 것들을 속에 넣고 걷는 사람과 울퉁불퉁 거칠기가 비교가 되지 않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것들이 뱃속에 넣고 걷는 일은 차이가 크다.

뭐랄까.

아무런 위험이 없기를 바라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고 그러는데 어느 순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낼 수 없을까를 꿈꾸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밥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밥을 좋아한다.

말했듯이 김밥의 생김새와 김밥이 풍기는 분위기와 그 쓰임새를 애'정'한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김밥은 산꼭대기에 부는 바람을 친구로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람을 고양시키는 힘이 김밥에게는 있다.

더군다나 오늘 토요일, 아침인지 점심인지 불분명한 시간에 눈을 뜨고 일어날 사람들에게 김밥은 천국 같은 거 아닐까.

한 조각의 김밥에도 손대지 않고 9시, 9시 반, 10시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에 일기도 쓰고 시를 닮은 시를 살짝 흉내 낸 시, 그 시를 다시 허물고 세우고 그러다가 쓰지 못한 시를 썼다.

세수를 하지 않는 것이 토요일 아침에 흔히 목격하는 현장이다.

막 일어난 애들 엄마가 "어머, 무슨 김밥?" 그러니까,

세수를 하지 않은 산이가 "아빠가 사 왔나 보네!" 그랬고,

세수를 하지 않을 강이가 "토요일은 김밥이 좋지." 그랬다.

나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김밥 세 줄에 어제 삶아놓았던 고구마 2개에 우유, 참고로 나는 이제 우유도 못 마신다.

포도 2송이가 오늘 아침이다.

일상은 소중한 맛에 좋고, 일상을 벗어나면 할 이야기가 많아서 좋은 것 같다.

김밥 하나로 산이와 강이가 수다스럽다.

먼 옛날 '어린이집' 시절의 소풍까지 꺼내놓으면서 '나 때는 말이야'를 남발한다.

엄마표 김밥이 뭐 최고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요것들이 사람 엉덩이를 두둘 길 줄 아는 나이가 됐다.

조금 무서워진다.

그리고 많이 먹는다.

나는 겨우 한 줄을 먹을까 말까 하고 있는데 접시가 텅 비어있고 껍질들이 시체처럼 쌓여있다.

우유도 원샷을 즐긴다.

I'm full, but the morning is still young. Bottoms up!

무섭다....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편이 오늘을 살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설교 시간이다.

"김밥이 맛도 맛이지만 이게 중요한 거 같아."

배가 부른 소크라테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보며 뭐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니, '배고픈 돼지'라는 말처럼 비극적인 말도 드물겠구나.

내가 막 첫 문장을 입 밖에 냈을 때, 산이와 강이는 소크라테스와 돼지의 중간쯤 되는 표정들이었다.

"김밥을 같이 나눠먹으려는 마음을 너희는 아느냐?"

나는 우진이 아빠의 그 마음을 오늘 아침 맛있게 그리고 영양가 좋게 먹었다.

비록 그것이 어떤 식으로 내 뱃속에서 소화가 될지 모르지만 김밥 3줄로 사람의 영혼까지 치켜세워주는 솜씨를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산이와 강이의 표정이 점점 사람의 그것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이야기했다.

"우진이 아빠는 아빠한테 일본어를 하나씩 배우다가 이제는 가족들이랑 일본 여행도 다녀오잖아."

저희들도 그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끄덕인다.

아저씨가 정말 많이 노력하는 것을 아빠는 안다.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애쓰는 것도 감동적인데 우진이 아빠 좋은 점은 그것보다 훨씬 커."

그게 무엇인지 너희는 알겠냐고 내가 묻는다.

11살 강이가 손가락으로 두 조각 남은 '내 김밥'을 가리킨다.

남겨두길 잘했다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래, 그거야, 토요일 아침에 김밥을 사 갖고 찾아오는 마음."

그게 쉬운 것 같아도 악보에 있는 콤마 모양의 숨표 같은 거라서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쉼표와 숨표 사이를 소리를 내가며 연주하는 것이 곡 曲이다.

나야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숨 쉬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노래를 한 곡쯤 연주하면서 살고자 한다. 아니 살아가고 있다.

명곡이니 아니니를 떠나서 시작했으면 불러야 하고, 부를 거면 끝까지 부르고, 이왕이면 제대로이길 바란다.

숨을 쉬는 곳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곳곳마다 내 쉬는 숨도 그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공부한다.

쉼표는 소리가 쉬는 곳이다.

숨표는 숨이 쉬는 곳이다.

우진이 아빠의 토요일 하루가 하나의 노래였다면 김밥은 그의 숨표였을 것이고 쉼표는 그 김밥을 즐겁게 먹은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숨으로 우리를 쉬게 하였다. 즐겁고 아늑하고 편안하게 말이다.

나는 산이와 강이, 두 아이들과 계속 밥을 먹어가며 나이도 먹어갈 것이다.

내가 적어두는 '밥상머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밥 먹어가면서 나이 먹어간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가야 할 이야기 말이다.

오늘도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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