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30cm / 박지웅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 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30cm 안에 들어온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선운사 대웅전 마당에 눈이 내릴 것 같은 거리,
내장산 애기단풍이 태어날 것 같은 거리,
부여 사랑나무에 푸른 잎들이 시시덕거리며 속삭이는 거리,
멀리 김제 광활 너른 들판으로 아지랑이 흔들리는 거리,
무녀도 근방에서 바라보는 저녁 하늘이 바다 위에서 불타는 거리,
십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 꿈에 보이는 거리,
그 사람에게 잘 있느냐며 웃으며 인사하고픈 거리,
엄마가 어머니로 매일 변하는 것이 어색한 거리,
우리 아이들이 밥을 두 공기씩 먹기 시작한 거리,
여름날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가을 첫날 같은 거리,
눈이 내리면 어디선가 애인을 기다리고 싶은 거리,
막걸리라고 쓰여있는 가게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거리,
밖에 나서면 어김없이 왼쪽 눈에서 눈물이 번져오는 거리,
뻣뻣하다며 누군가 주물러주면 가슴이 먼저 풀어지는 거리,
아, 여태 걸었어도 다 못 가본 수많은 거리,
누가 이 거리에 서 있는 것이 눈에 잘 들어오거든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