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백일홍 / 도종환

시의,

by 강물처럼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 일을 아름답게 피어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우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배롱나무를 그리워했다.

배롱나무는 이렇게 아무 데나 심어 놓을 나무가 아니다.

지나는 길에서 마주치는 배롱나무를 보기에도 고운 손으로 살살 보듬어 보는 그는 어디에서 왔던 사람이었나.

옛날엔 글 좀 읽는 선비네 안마당에나 심어놓고 볼 수 있었던 것이 흔해졌다고 이런다면서 뜻 없이 흔들어본다.

베롱은 자라는 동안 계속 엷은 껍질을 벗겨 제 몸에 때가 끼지 않는단다.

옆에 서지도 못하고 그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길에서도 나는 행복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하늘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때 무슨 풀벌레가 날았는지 다 그려낼 수도 있으니까.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세상을 모르는 나는 그의 풍경을 그리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그는 바라보고 나는 그린다.

백일홍이란 말을 그에게서 배웠다.

꽃으로 피어나는 백일홍 하고 나무로 서서 사는 백일홍을 내 손에 쥐어주며 한 자 한 자 가르쳐주던 바람.

몸에 두른 겉피도 없이 홀연하고 가벼워서 내일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목백일홍은 환한 얼굴이다.

나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먹는 나이가 제일 맛이 난다.

최명희 무덤에 가면 나이를 알 수 없는 목백일홍이 부채처럼 그늘을 만들어 가난했던 소설가를 다독인다고 그랬다.

거기 앉아있으면 사는 것이 다 유치해져서 설익은 냄새가 나는 그의 백발白髮이 싫어져서 돌아온다고 그랬다.

꽃이 분을 바르고 피어있더라.

한 백일쯤 그렇게 사랑해도 좋겠더라.

허물을 벗은 뱀처럼 말랑해져서 아니면 매미처럼 투명하게 날아온 그 말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줄 것을 안다.

여름이 지나면서 배롱나무는 더욱 분발할 것이다.

살고 지는 것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피고 지고 또 피면서 백일, 그렇게 머물러 줄 것이다.

열흘이면 꽃은 다 진다는데 제 속에 열흘 된 것들을 다 떨군 채 웃는 속을 내가 알려거든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책 한 권을 보고서 감탄하는 나는,

그림이나 사진, 풍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나는 헛되다.

묵주반지를 한 손가락에 끼고 사는 것이 종교 일지는 몰라도 믿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종교가 믿음을 딛고 그 위에 몸을 푼 것은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까마득해졌다.

백일홍 나무에게 기대는 날이 많아질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이와 어른 / 정연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