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믿음에 대하여 / 최문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피가 날 때까지 믿는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 난 뻐꾸기시계가 4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귀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 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다 지우고 나면 무엇으로 남을까.
마치 다비식을 치르듯이 깨끗하고 조용하게 나에게서 나마저 치우고 나면 그 뒤에 남을 것에 대해서 심심甚深한 사과謝過를.
흩어지고 말 것들이어서 손에 쥘 것도 없다면 잠자리 날갯짓에 실어 보내기.
그러는 사이에도 그대에게 꼭 가야만 하는 것이 있다.
땅에 부딪혀 수만 개 파편으로 사라지는 빗줄기는 '믿음'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대'라는 믿음이 저를 기다린다는 '믿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들에는 소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게 벌이다.
실컷 울어봐라.
맘껏 원망해봐라.
네 소리는 울음도 아니고, 네 원망은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은 벌이다.
태어난, 이 땅에 떨어져 버린 벌이다.
마지막에 울릴 '소리' 하나를 유일한 언어로 아는 나는 다른 몸짓도 없다.
신호도 없이 약속도 없이 운명도 없이 곧장 너에게로 간다.
어떤 소리가 날까.
그 소리로 나는 너를 만났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만들어낸 소리가 너를 찾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주파수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 믿음이다.
백 년을 내렸던 빗소리가 오늘 밤에는 모과나무에게서 들린다.
열 두 걸음 곁에는 초례청醮禮廳에서 웃었던 일로 딸만 낳고 소박맞은 은행나무 하나가 빈 밤을 채우고 있다.
온통 빗소리다.
무수한 하나가 무수한 하나를 찾아간다.
하늘을 넘어가는 소리와 산을 넘어가다 마는 소리가 서로 섞인다.
울음도 원망도 없이 멀리 사라져 간다.
반토막 남아 높이 오르지도 못하던 소리 하나가 은행나무 밑동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예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은 나무 아래로 떨어지던 것이 다시 오른다.
비가 그치니 우듬지에서 반딧불이 출렁이고 있다.
그래, 다 지우고 나면 무엇으로 남아야겠나.
남길 것 없다 하고 냉정히 돌아서지 말고 다만 너를 믿었다.
너를 믿는 나는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를 따라 만리 밖에 다녀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