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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r 09. 2023

응원

아빠가 쓰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많이 늦었으니까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강이는 씻고 나와서 작은 용기에 든 쌀국수를, 산이는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그대로 짜파게티를 만들었다. 식탁 위에 불을 켜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갑자기 일이 두 가지나 생겨서 아마 11시나 돼야 올 수 있다고 그랬어,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보다 더 심한 일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늘 이런 식으로 늦는 날에는 아파트에 긴급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일부러 다른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를 보내느라 수고한 뒤라 서로들 배고프고 피곤하니까. 덜렁 김치 하나만 식탁 위에서 엄마의 부재를 확인시켰다. 무엇보다도 말이 없었다. 면발 훌치는 소리만 훌쩍거렸다. 엄마가 없으면 떠들지도 않겠구나, 싶었다.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그릇을 깨끗이 씻었다. 늦게 일하고 들어오는 사람이 눈 흘기는 일이 없도록 마른행주로 물기를 다 닦아냈다. 청소기로 거실 먼지와 머리카락을 쓸어 담고 더 할 것이 없나 확인하고 나도 내 자리에 누웠다. 산이와 강이는 무엇을 할까. 숙제하라는 말은 줄였다. 그런 가벼운 말로 시간을 채우고 싶지 않아서 사소해지기로 했다. 하나마나한 것들은 말하지도 바라지도 않기로 노력한다. 잘 안되니까 비뚤거리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러기로 또 마음먹는다. 대신 내 남은 시간을 살피기로 한다. 이 많은 공부들을 어쩌면 좋을까, 즐거운 고민으로 돌돌 말아본다. 나는 김밥처럼 소풍을 가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아직 오지 않고 나는 유튜브를 보면서 멀리 아이슬란드를 다녀본다. 어제는 네팔에도 갔었는데 내일은 또 어디에 있는 나와 마주칠까. 밤늦은 시간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전해진다. 저 소리 하나를 타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편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친애하는, 혹은 보고 싶은, 그것도 아니면 어떤 말로 시작하는 연서 戀書 같은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Starry Starry Night, 불현듯 별 헤는 밤을 올려다보는 그 화가가 만나고 싶어서 멀리 프랑스의 남쪽까지 걸어볼 각오도 해보면서 나는 오늘도 낡아갑니다. 오늘 밤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흐뭇하게 먹는 따뜻한 크림수프가 사람을 흩어버립니다. 아직 들리지 않는 현관문 소리를 기다립니다.

오늘 운이 좋았다며 그 와중에 웃습니다. 그런 사람이 엄마여서 너희는 좋겠다고 혼자만 생각합니다. 그래, 부리나케 강이가 먼저 나가 엄마를 붙잡습니다. 너도 귀를 기울였구나, 싶어서 고마운 정이 솟습니다. 산이도 이제야 하루를 벗고 씻으러 들어갑니다. 엄마가 돌아온 집은 그제야 집이 됩니다. 나도 모르는 척 일어나 식탁에 앉습니다. 다시 불이 켜지고 모두의 하루가 식탁 위로 차려집니다. 우리 저녁 먹지 않았나?

산이는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장 후보들이 7명이나 나와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자기가 되었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숫기가 없던 아이여서 그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공부로 바쁠 텐데 싶으면서도 걱정하지 않기로 합니다. 아빠는 병원 가보지 않아도 되냐고 엄마한테 묻더라고 엄마가 전해줍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힘이라고 믿습니다. 공부는 거기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그 뜻을 잘 펴나가길 바랍니다.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많이 늦었으니까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늦은 이야기를 나눴고 늦은 음악을 들었다. 삶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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