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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02. 2023

접시꽃

일기 혹은 시

 

첫해는 꽃을 피우지 않고 저를 튼튼히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고 그런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꽃을 피우고 그다음부터는 크고 예쁜 꽃잎이 벌어진다. 접시꽃답다. 여름에는 그렇게 손바닥만 한 꽃이 하나씩 선물로 주어지면 좋을 것이다. 이 꽃을 드세요. 가만! 내가 그린 것은 머리 위로 살짝 더 올려 가는 곳마다 그늘이 한 조각씩 생겨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드세요' 그러면 어떤 이는 의아스레 나를 바라보겠구나. 이 꽃을 먹나요, 그래도 되나요? 물음이 웃음이나 울음처럼 말이 되지 못하고 공중에 뜬다. 비눗방울이 용케 날아간다. 그 사이로 빛이 든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들은 모두 이렇게 그림자를 갖춘다. 물이 들고 소식이 그 위를 떠온다. 달빛도 함께 출렁거리는 밤이면 시간이 꿈틀거리며 굼벵이 소풍을 나선다. 그래서 7월은 무엇이든 잘 피어난다. 나고 드는 것들이 장마 따위에 질세라 차곡차곡 날을 연마한다. 꽃으로 마음을 베였던 적 있거나 벤 적이 있다면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열매는 그렇게 맺는다. 드세요, 이쪽으로. 그리고 드세요, 맛이 좋습니다. 어떠세요, 마음에는 드세요? 사람의 숨에서 사람이 맡아지는 더운 계절을 그대는 가졌는가.

비가 그친 다음날은 접시꽃을 펴며 접으며 시간을 들인다. 빛을 따라 내 안에 드는 것들을 맞이하는 오후, 잘 드는 가윗날처럼,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것으로 하늘 한구석을 가르고 거기에 커다랗게 방을 들인다. 뒤에 남은 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그리워하는 그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땅에서 하늘로의 드라이브, 남은 빗물을 쏟아내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마련한 곳에서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진다. 잘 있었냐는 말은 그런 말이었구나. 죽어서도 먼저 묻는 인사였구나.

접시꽃 당신을 다시 읽는다. 겨우 스물몇 살에 내가 뭘 알았겠나. 다시 읽는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내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삶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습니다.

- 접시꽃 당신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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