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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10. 2023

일본 드라마 해협 海峡

쌍무지개가 떴다


2007년 일본 NHK 드라마, 해협 海峽을 유튜브로 봤다. NHK라서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개인적으로 NHK는 역사극이나 시대극에 특히 강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그것도 1940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라마 한 편을 한 번에 다 볼 수 없었지만 - 다른 일과 중이어서 - 점점 흥미가 더해지는 것이 나름 좋았다. 하루가 심심하지 않았다. 하던 일을 잠시 마치고 나면 곧 의자에 앉아서 그다음 이야기를 펼쳤다. 어릴 적 만화책을 몰래 숨겨가면서 봤던 감각이 떠올랐다. 심부름을 다녀오면서도 하나도 귀찮지 않던 그 느낌, 어서 가서 뒷부분도 보고 싶고 어차피 보게 될 것, 이렇게 남겨두고 밤까지 기다릴까 싶은 생각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하늘. 나는 재미있는 것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혼자서 느긋해한다. 이야기 속에 풍덩, 그리고 거기 나오는 사람들을 따라다니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래, 그건 아마 사랑일 것이다. 현실에서 내가 헤엄치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소설이나 영화, 스토리가 있는 공간에서는 자꾸 지느러미나 나오고 비늘이 아른거린다. 아가미로 물방울이 또로록 생겨난다. 기포 하나에 문장 하나, 부호 하나, 느낌표도 따옴표도 홋카이도에 점찍어 놨던 후라노, 라벤더 향기도 비친다. 영롱하다 할, 오케스트라의 연주 위로 내가 피어난다. 연기처럼 무대에서 객석으로, 객석에서 사람들 눈동자를 스치며 오랫동안 그 순간에 고정된다. 내가 네가 되어 보는 우연의 일치를 작품이라고 부른다.

슬픈 것들의 정수를 담고자 한다. 그것은 흔하지 않아서 백 걸음을 걷고도 얻지 못하고 천 걸음을 걸어서 얻을 수 있다면 아까워하지 않고 주저 없이 찾아가고픈 나라다. 내가 닳아서 거기 영롱한 것들이 한 잔, 솔직하게 한 병 정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해협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말해주는 드라마였다. 어쩔 수 없는 사연, 관계, 슬픔, 인간을 어떻게 하면 보여줄 수 있을까 애쓴 드라마다. 하지만 방법이 영 없어서 드라마가 먼저 울고 말았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나는 그 지점이 상냥했다고 쓴다. 또한 사랑스러웠다고, 건 adorable이라고 쓰는 게 좋겠다. 남자는 조선인, 여자는 일본인, 그러나 여자는 부산 태생이며 남자는 일본 헌병대 출신이다. 그런 시대였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마주치는 나는 '그런'나와 '이런' 나를 왕래하고 있다. '그런'나를 마주하면 총체적으로 불편하다. 무엇으로 그를 위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는 서툴고 래하며 때때로 어긋난다. '이런'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안타깝게 바라보는 일이다. 지금을 바라보는 훗날의 나는 그러지 않기를 기도한다. 바람을 담은 소원이 뜬다. 그날에는 서쪽 하늘에 둥둥 연등이라도 떠올랐으면. 마지막 대사는 나이 든 여자가 맡는다. 현해탄을 앞에 두고 남자는 그간의 사정을 들려준다. 까치가 바다를 넘지 못하는 것은 타고난 운명이다. 내 운명에는 많은 운명들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되어 있음을 토로한다. 여자도 토한다. 더 이상 내 꿈에 보이지 않기를. 그대여, 내가 만났던 그러나 다 만나지 못한 사람이여.

여름을 끓이던 불이 탱천 撑天 하는 사이로 구름을 모아 비바람을 칭칭 동여맨 지팡이를 짚고서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번 태풍은 한반도를 종단한다. 전쟁은 다시 전쟁을 낳고 목관도 없이 사람만 땅에 묻어대는 나장 裸葬을 한다. 곡 哭은 했을까. 제사도 마음으로만 지내는 운명들이 있다. 사람은 슬픈 악기다. 웃고 있어도, 웃다가 잠들더라도.

여름 하늘에 쌍무지개가 신비로웠던 어제였다. 나는 저것을 본 적 없는데 곧 밤이 들 텐데 사방이 연한 녹색으로 붐볐다. 딸아이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하늘 같다며 사진을 찍는다. 곳곳에서 무지개 봤냐며 물어온다. 자기들이 본 무지개를 보내준다. 이상하게 무지개가 사라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밤새 내렸다. 지금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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