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완강했어도 시들어 간다. 목 백일홍이라 불러도 좋을 올여름이다. 분홍색 꽃들이 '함께해요'라는 말처럼 나무 하나에 가득하다. 지는지 피는지 모르게 날마다 치장을 하고 틈도 하나 없이 가지마다 빽빽하면서 곱다. 비가 내린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바람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어디에 전할까, 가을입니다라고 쓰다가 쓱쓱 지운다. 아직 여름입니다. 배롱꽃이 피었습니다.
가만 손가락을 꼽아 헤어 보면 그리 긴 날이 아니었다. 내려도 너무 내리는 것 아니냐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7월이었다. 해가 나지 않아서 논에 가득 펼쳐 놓은 벼가 잘 자랄까 싶었던, 막장 같았던 날씨였다. 7월을 며칠 남겨놓고 습하고 더운 기운이 뻗쳤다. 그 팡파르를 기억한다.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그렇게 여름을 맞았다. 군사를 쓰지 않고 전쟁을 여기까지 잘 끌고 왔다는 계산이 섰다. 여름이 악착같이 달라붙어도 8월 한 달은 버텨낼 것 같았으니까. 이 싸움은 적어도 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장 戰場이 급변하는 순간을 찍는다. 내 몸을 탐구하듯이 자세히 사진 찍어 살핀다. 남쪽에 진을 치고 꿈쩍도 않는 저 속내는 무엇인가. 나는 갑옷을 벗고 붓으로 일전에 대비한다. 여름이 이 땅에 상륙하고 한 달이나 지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단기필마로 볕이 나는 광양 光陽에 출현. 척후의 임무를 떠났던 7월 끄트머리에서 흘렸던 땀이 생생하다. 두려웠던가. 힘들었던가. 나는 백운산을 오르면서도 내리면서도 해낙낙하니 마치 내 집의 안뜰을 거니는 듯 가벼웠다. 다만 모기가 쫓고 옷이 땀에 축축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길은 멀어 보였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여름과 나의 첫 합 合*이었다. 그 기세만 살피고 싶었으나 일이 어디 내 뜻대로만 되겠는가. 천이백이나 되는 몸을 일으켜 나를 흔드는 그대는 하군 夏軍의 만호 萬戶*였던가, 수문장이었던가. 너그러웠다. 그대와의 일 합은 오래도록 내 몸과 마음의 수양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거대했으나 압박하지 않았다. 적이었으나 나와 같은 큰 자연의 일부였다. 호감이 갔다. 적진에서 옷을 벗고 계곡물속에 잠겼다. 그렇게 여름이 세상을 덮어가는 것을 보았다. 8월이 시작했다.
설렘이라는 감정에는 땀에 젖어 후줄근한 모습이 담기지 않는다. 풀 내음이 날 것 같은 시절, 새물내*가 맡아지는 상대에게서 몽글몽글 생겨나는 별들, 과연 여름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늘 높이 쏘아 올리면 슬프게도 기쁘게도 비산하는 꽃들이 전하는 말, 설렘을 조각해 보고 싶었다. 운명을 앞둔 미켈란젤로가 끌과 망치를 들고 새기다 만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었다. 쓰러지는 아들과 그 아들을 뒤에서 받치는 어머니가 있었다. 돌조각이라도 가냘픈 것이 그물망처럼 내게 퍼진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수직의 파문을 낸다고 했던가, 미켈란젤로가 보낸 여름은 어느 순간 절정이었을까. 그는 천 년보다 훨씬 더 오래전,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땅에 내려서 어떻게 돌에 새길 줄 알았을까. 설렘은 이렇게 뜻밖의 일을 나와 연결시켜 주는 중매쟁이다. 설렘을 넣어 마시는 여름을 꿈꾼다.
460년이나 지난여름을 피에타 앞에 가져갈 수 있다면. 내 여름은 그럴 만할까. 삶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사금파리 조각들이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울림을 전하는 인다라망, 그 화엄의 세상을 건너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초라한 것도 가난한 것도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수히 사람들이 살았던 여름과 사람들이 살아갈 여름에 날아오른다. 줄이 떨면서 선율이 된다. 수도승처럼 음악이 흐른다. 여름은 얼굴도 많다. 격렬하고 뜨겁더니 서정적이고 정적이다. 타이스 명상곡을 서해가 한 아름 안기는 장군봉 위에서 듣고 듣고 들었다. 동쪽 선유도 해수욕장을 내려보며 저기가 지중해라고 하면 아까 차를 세웠던 주차장 있는 데에서 여기 앞에 있는 데까지 이탈리아, 그 맞은편이 아프리카 대륙이 되는 것이지, 중동은 저쪽 아래, 장자도 입구가 이스라엘 땅. 더위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8월은 성 城에 있어도 여름이다. 먼저 바다로 길을 텄다. 바다는 다 받아들이고서도 바다였지 않은가. 그 바다가 끝내는 사람이 쏟아내는 오염수를 들이켠다. 물을 먹인다. 살아있는 것들을 못살게 구는 인간의 악취미도 열기를 더한다. 바다에서 본 저녁놀은 불이었다. 속으로 지는 것들은 빨갛게 타오른다. 열을 이기지 못하고 저를 잃어버린다. 가고 보내는 마음이 바다에 가득했다. 어디로 지는가. 더워도 더운 줄 모르는 여름이 거기 있었다.
¶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雨歇長提草色多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네 送君南浦動悲歌
고려 정지상의 '송인 送人'을 펼쳐본다. 슬픈 노래였을, 봄날의 대동강에서 그가 불렀을 이별의 노래를 듣는다. 강물은 천 년을 흐르고 천 년 세월은 그 강물 위를 감연히 지키고 있다. 거기에 사람이 산다. 만나고 헤어지고 웃고 울면서 산다. 그의 노래가 나를 적신다. 한낮을 지나 오후로 가는 여름에도 매미 소리 요란하였다. 지리산에 다녀와야 한다. 8월이 짙을 때, 한고비일 때, 하늘이 뚫어져라 쾌청한 날에 지리산 어느 모퉁이를 작심하고 걸었다. 여름을 위하여 땀이여 솟아라. 나는 줄을 늘어뜨렸다가 당기고 당긴 줄에 표식을 달아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칭칭, 여름이 쾌지나 칭칭, 가고 지고 가고 지고, 쾌지나 칭칭 나네. 서산에 지는 해는 긴 끈으로 매어 두자. 애들아, 그때가 언제였는지 어슴푸레하다. 쉬었다 가자고 푸념하고 얼마나 더 걸어야 하냐고 불평하던 시절이 아빠는 그립다. 나는 고맙다. 너희가 예뻤다. 오래 두고 내가 먹을 약이다. 나를 살리는구나. 여름에는 여름을 덥고 여름을 입고 여름을 먹고, 우리는 여름이었다.
정지상의 노래를 마저 듣기로 하자. 슬픈 노래는 자기 있는 데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래야 승화된다. 날아오른다. 날아오르면 다 풀어진다. 더 이상 노래도 아니고 슬픈 것도 없다. 나는 지금, 여기서 듣기로 한다.
¶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까 大洞江水何時盡
해마다 푸른 물결에 이별의 눈물이 더하는데 別淚年年添綠波
어제는 비가 내렸다. 8월 30일 오늘, 비가 내린다. 하루 앞서서 보내기로 한다. 바랑 하나에 무엇을 챙겼던가. 거기 넣어 준 것이 나인 줄 언제쯤 알까. 조심하라는 한마디를 그 위에 얹는다. 여름이 미소 짓는다. 그 미소, 보기 좋다. 예쁘다.
* 합 合 ㅡ 칼이나 창으로 싸울 때 창과 칼이 부딪히는 횟수를 세는 단위
* 만호 - 萬戶, 종 4품 - 1만 가구 정도의 행정 치안 병력을 지휘하는 직위, 중령급
*새물내 -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론다니니의 피에타 - 미켈란젤로의 만년 작인 대리석 피에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