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 끝에 맞닿은 코발트블루 위를 청년 하나가 내달리는 상상을 한다.
길게 저것이야말로 직선이 꿈꾸는 선 善이겠구나 싶게 그 끝에서 시작하는 달리기에는 그리움 같은 물씬한 감정도 멈출 것 같지 않은 기백과 젊음이 푸르게 푸르게 짙다.
바다가 바다다워서 시큰해지는 눈을 탓할까, 심장이라도 꺼내놓고 해풍 海風에 널어볼까.
이 가을에 우리는 걷고 있다.
존 레넌의 OHMYLOVE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러브, 사랑이 아니라 러브, 러브를 만져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을 숨 쉬고 그것으로 머리를 감고 온몸을 한 바퀴 돌아 나오게 해서 오늘은 러브가 되어야겠다. 는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있다.
수잔은 애들 엄마가, 루시는 11살 강이, 당연히 에드먼드로는 강산이가 어울린다.
나는 기꺼이 그리고 흔쾌히 피터가 되어 옷장 안으로 우리는 들어간다.
나니아로 가자, 우리들이여.
산이가 길동무를 만났다.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에서 나는 타원형 거울을 들여다보듯 후박나무 이파리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사랑은 그대로 두고 이 나무에게 어울리는 집을 눈대중으로 설계하던 중이었다.
길을 가던 나그네 그대로의 나그네 아저씨가 싸드락 싸드락 걷는 산이가 기특했던가 말을 건네셨다.
처음으로 산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겼다.
두 사람이 저만치 뒤에서 발을 맞춰 걸어오는 모습이 다정해서 흐뭇했다.
길 위에서 누군가와 동행이 될 줄 아는 것은 멋스러운 일이고 낭만 같은 것이니까.
나그네 아저씨는 나보다 더 오래 세상을 걸어오셨던 분 같았다.
걸음에 진득하니 찰진 박자가 달라붙어 있었다. 끈기가 좋아 보이는 보폭에 부드러운 동작으로 한 발이 다른 발을 채면서 어여쁜 새색시와 아들을 떠나보내는 홀어머니의 걸음까지도 함께 선보이는 걸음.
'그의 걸음을 보면서 아들을 맡기다.'
마치 하늘이 묻는 선문답 禪問答에 바람이 건네는 문장이 가슴께로 흘렀다.
봄볕에 새만금 방조제가 시작되는 마실길에 첫발을 떼고 우리는 세상을 구비구비 돌아다녔다.
학교에도 나갔고 회사에서도 바빴으며 어느 날은 병원에도 다녀와야 했다.
지리산에도 들렀다가 이십몇 킬로나 되는 산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즐겼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다 나니아가 우리들에게 필요로 했던 가치들 아니었을까.
욕심이나 질투, 그것들을 대하는 믿음 같은 가치를 우리는 걸음마다 하나씩 주워 담았다. 땅에다 주고 우리가 건네받은 것들, 길 위에 우리가 새겨놓을 것들로 우리는 더욱 튼튼해진 것이 아닐까.
박자를 넣을 줄 알고 흥을 곁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팍팍함이란 그저 '아으 동동다리' 같은 여음구 같은 것이다.
상사화가 모여 있는 곳을 지나든 볕이 들지 않는 대숲을 지나든 우리는 마실길을 걸었던 것뿐이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면 빈껍데기 같다는 말도 기억한다.
아빠한테 들었던가, 책에서 봤던가 그랬다면서 나그네 아저씨에게 한 수 배운 산이가 옆에서 걷는다.
나도 몇 번이나 되풀이할 자신이 있다. 이렇게 푸른 하늘과 바다를 두고 너그럽지 않을 것은 없다.
길을 도 道라고 가르친 뜻을 알게 되면 걸음은 그 도를 깨우치고 연마하는 수행이 될 것이다.
길이 들어가는 것들, 길이 가르쳐주는 도리 道理에는 사람에게 더없이 소중해서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으로 살게 한다.
"아빠가 잘 걷는 거래, 아빠처럼 걸어야 오래 걸을 수 있대."
우스운 녀석이다.
그동안 걸으면서 내가 했던 말들은 다 어디 두고 10분 같이 걸었던 아저씨의 말을 새긴 것을 보면 하여간 재미있는 인생이다.
하지만 바람은 그런 것이다.
태풍 속에 있더라도 늘 함께라면 그것이 과연 태풍이겠는가.
나는 산이에게 어느덧 삶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가장 수고로운 사람이 아무래도 11살 강이다.
걸음걸이도 살짝 안쪽으로 모아 걷는 발 모양이어서 더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그 아이가 걸어준다.
11살짜리의 공양으로 나머지 우리 셋이 시간을 살찌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걷지 않겠다면 우리도 걷지 못하는 것이 공동체의 삶 같은 거 아니겠는가.
늘 너에게 감사한다.
캐스피언 왕자가 아슬란에게 나니아의 왕으로서 자기는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을 할 때,
아슬란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 겸손이 자격이다.'
강이는 무엇이 되든 항상 문장 文章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잘 걸으면 다들 좋으니까, 나도 좋고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으니까.
혹여라도 내 바람이 너를 힘들게 하지는 않기를 아빠는 늘 약속하기로 하자.
유혹에 강해지라고 주문하는 나니아의 주인공들에게 부탁하는 그 마음으로 아빠도 너를 항상 지켜보기로 하자.
어디가 좋았었냐.
무엇이 사라지지 않고 남았느냐.
어둠이 내리면 낮동안 있었던 빛은 사라진다.
빛이 위대한 것은 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덕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별은 낮동안 볕을 쬐고 자라는 하늘과 바다와 땅을 신기해하면서 저도 빛나고 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믿음은 그렇게 오래 계속될 것이다.
나는 하룻길을 마치고 버스에 앉아 바라보는 시골 경치를 러브 한다.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마음, 숨길 수 없는 나다.
모든 것들이 러브하고 있는 풍경이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익어가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