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가을이 그 거 좀 물들이자니 쉬운 것이 없다
밤송이가 여물다 보면 벌어지고 그러다 보면 땅에도 떨어지는 건데 그거 좀 주워간 데서 무얼,
그 숲에 하나 보이던 자작나무가 가운데서부터 부러져서 못쓰게 됐다
밤새 불었던 태풍 이름이 콩레이였다는데 그것이 婚禮라는 일본말이라는 것이
오늘 아침 어쩐지 서럽다.
아직 굵어보지 못한 저 생떼가 내 앞에 누워서 이파리 수천 잎을 보듬고 있다.
열 밤만 자고 나면 다 떨어져서 낙엽이 되고 내년이 되었을 올해의 기억들이 찰랑거리면서 안녕,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살아봐도 좋았을 것을
가을은 너 마저도 손 내밀어 주지 않고서 아침하고 점심, 저녁을 먹는다.
가을이 그 거 좀 물들이자니 문은 닫아걸고서 기척만 어떤 기척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