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야, 신발 하나 더 사도 돼."
식탁 맞은편에 강이가 앉았다. 나와 강이 사이에 아내도 자리를 잡았다. 오렌지빛이 감도는 불빛이 머리 위에서 우리를 비췄다. 플레인 요구르트에 섞인 블루베리가 통통해 보였다. 어제저녁에 잠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하루가 다 지나고 꺼낸 이야기로 이제 무엇을 담글까. 적당히 숨이 죽었다. 소금에 절이지 않고 속에 담고 있기만 해도 먹을 만하게 연하다. 세상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
그런 줄을 모르지 않았다. 강이 걸음이 조금은 삐뚤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갔었지 않나. 더 크면 바르게 자리 잡힐 거라고 그랬던가, 저절로 좋아질 거라고 믿었던가. 그렇게 오래 걸어본 적 없이 지냈으니까. 어디든 차를 타고 다녔고 공원 같은 데를 산책하는 일은 날개처럼 가벼워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자신이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오늘에서야 적는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거나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에서 한국과 일본 선수들이 시합을 하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정신력 그리고 팀워크. 정신력 안에 팀워크가 있고 팀워크가 곧 정신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팀이나 한국의 보도, 중계 매체는 정신력을 앞세운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그 말이 여전히 분위기를 압도한다. 정신력만 강하면 모든 경기를 이길 것만 같고 정신력이 나약해서 진 것이라고 들린다. 나도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2000년 초반에 j리그를 챙겨 보면서 두 가지를 알았다. 유소년 축구 육성이 필요하다는 것과 정신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체력이며 그것은 평소의 태도와 관심, 애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기술은 그다음이다. 체력이 뒷받침되고 야망이 있는 선수는 기술을 습득해서 프로가 되고 또 일류가 된다. 그 과정이 질서 정연하고 선명했다. 언젠가 일본 축구가 한국을 따돌릴 것만 같았다. 그때에도 우리는 비장하게 '정신력'을 외치면서 돌진하고 있으면 얼마나 처연할까 싶었다. 독립운동하듯, 왜선을 무찌르듯 더 이상 그런 비장함은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다.
- 발바닥 아치는 신체 하중을 분산하고 보행 시 충격을 흡수,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아치가 무너진 채로 생활하면 통증이 발생하고, 심해지면 족저근막염, 무지외반증과 발목 염증까지 유발할 수 있다. 검색해서 찾아본 기사의 일부다.
사람이 바라보는 대상, 그 대상은 시선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인상을 갖는다는 것이 이 지점이다. 내 시선 위로 촉촉한 물기가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생명이 시작하는 곳, 물을 분해하면 애정이 7할을 차지할 것이다. 애정이 담긴 빛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야 서로 잘 살 수 있는 거니까.
암 수술을 받고 나서는 암이란 말도 착하게 들렸다. 다독거리고 싶었다. 누가 암에 걸렸다고 그러면 놀라지 않고 한 번 더 찾아가 말 상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 불안을 듣고 내 평화를 내어주고 싶었다. 변변찮아도 급할 때 쓸모는 있더라며 웃어 보이고 싶었다. 그가 따라 웃으면 제비꽃 마냥 편하게 보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강이 이야기는 신비하다. 딸이란 것이 아비에게는 늘 조그맣게 터지는 꽃망울이다. 금세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그 꽃들 말이다. 조그만 아이가 발이 아프게 걷더라는 그 말을 한다는 것이 야구며 축구, 내 반성과 회한으로 이어지고 마는 이 절묘한 곡선을 나는 아낀다.
그래, 강이가 발이 아프도록 걷고 있었다. 그때가 5학년 5월. 우리는 각기 자기 먹을 것을 챙겨 배낭을 둘러메고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있었다. 할 말을 속에 담고 철썩이던 바다는 격포를 지나 줄포만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빛을 띠었다. 침묵의 바다, 나가사키에 가면 시리고 시린 파랑을 볼 수 있다고 속삭이면서 어린것들 둘을 데리고 걸었던 부안 마실길도 그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바다로, 산으로 찾아 나섰던 시절이었다. 보통은 10킬로 내외로 하루 일정을 잡고 걸었던 탓에 다들 지친 기색도 없이 씩씩했었다. 소풍이었다. 어디서든 자리를 펼치고 앉으면 거기가 무릉이었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화담 和談이며 화담 華談이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은 날들이었다. 산길 15킬로를 넘어서면서 끝날 것 같은 길이 이어지고 결국 강이가 울어버렸다. 작은 표정에 눈물이 똑똑 그려졌다. 나는 거기서 '다 왔다'라는 말로 길을 재촉했다. 아직도 동네를 두 개는 더 지나야 금계에 닿을 것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으로 타일렀다. 어미가 있어야 새끼들은 자란다.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자란다. 사람은 저 혼자서 자라지 못하는 생명인 것을 아비는 무심하게도 잘 깨닫지 못한다. 배고픈 것도 슬픈 것도 서러운 것도 기쁘고 자랑스러운 것도 어미에게 보였을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사람은 꽃이 만발하는 정원이어야 하지 않는가. 아내가 강이를 들춰 업었을 것이다. 그때 왼발이 더 크게 보였으리라. 살짝 어긋난 것도 같고 비뚤어지게 땅을 밟는 그 발이, 뒤꿈치가 마치 산처럼 보였으리라. 저 산이 아프겠다 싶으니까 그 산을 업고 가는 사람, 어미는 어미다.
그 뒤로 강이는 다시 병원에 찾아갔고 '부주상골증후군'인 듯싶다는 진단을 받았다. 따로 별다른 대책이 안 서는 사각지대에 놓인 듯한 심정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강남에 신발 깔창을 특별히 제작해서 발바닥 아치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업체까지 찾아가게 된 연유다. 석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찾아다니면서 강이도 부쩍 발걸음이 편해졌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한두 달 더 기다렸다 방문하고 있다. 그 사이에 강이도 엄마하고 둘이서만 돈가스를 먹고 싶다고 불러내는 소녀가 됐다. 서로 짝이 되는 엄마와 딸, 서로 짝이 되어 가는 엄마와 아들을 보면서 가끔 나는 홀로 섬이 되어 보기도 하는 사치를 부린다. 여자의 품이 넓다는 것을 새삼 알아가는 나이라니, 나는 말이 저절로 줄어든다. 내 말은 시대와 장소에서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것이 어쩔 수 없다. 나는 걷기나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 같다.
그래, 여기다. 여기가 오고 싶었다. 여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멀리 돌아오는 나는 세상살이가 어쩐지 아슬아슬하다. 거북도 되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토끼도 아니면서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두리번거린다.
"강이야, 그 친구한테 지는 것 같아도 괜찮아."
방학 동안 강이가 읽은 책 중에는 '죽이고 싶은 아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제목이 상상을 뛰어넘어서 나도 천천히 읽어본 책이다. 누구나 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부모들은 얼마간 공감할 스토리다.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곳, 학교며 직장이며 어느 한 군데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은 불안이 사회 곳곳에 만연한 지금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어디 선생님뿐이던가. 통계와 수치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갈등과 폭력의 대물림.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가는 이 비행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피로하고 중독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이 거대한 화수분은 과연 누가 만든 보물단지인가.
서울에 다녀와서 새로 맞춘 깔창을 거기에서 추천받은 신발에 깔았다. 그렇게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평소에 함께 어울리던 친구가 마침 그 신발을 신더란다. 표정이 좋지 않더니 급기야 그날은 외면하더란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면서 엄마한테 답답한 속을 열어 보이는 아이가 내 등 뒤로 보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 읽지 못한 '사피엔스'를 펼쳤지만 더 이상 문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기 전에 잠시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나도 싫다. 싫은데 지금은 필요하다. 강이야, 누가 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 너는 아무렇지 않아. 우리가 신발 한 켤레 더 살 수 있는 거니까 엄마하고 같이 신발 사라. 여기에서 멈추면 아무 일도 아냐. 너는 평화로워지고 그 친구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그 친구가 나쁜 거 같아? 나쁜 것은 더 나쁘고 무서워. 약한 거야. 그 친구는 1학년인 거야.
그러니까,
"신발 한 켤러 더 사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