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마음이 온통 소풍이다
2018, 7월 18일에 쓴
모처럼 뵈니까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한 달에 한 번 선운사 도솔암에 가는 날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분들은 나이를 잊은 듯 나들이 채비가 예쁘다.
환자복만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다가 이렇게 보니 흑백으로만 보던 TV에 천연색이 펼쳐지는 기분이다.
열댓 명이 모이니까 가뭇없이 잊고 지냈던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반짝 빛을 낸다.
좋은 날이다.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을 싱글거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제 역할을 하게 되면 사람은 행복해한다.
엄마가 다른 형제들 몰래 나 혼자만 챙겨서 넣어주는 백 원짜리 몇 개로 착하고 순한 양이 되지 않던가.
어제와 똑같이 뜨거운 햇볕이어도 오늘은 비타민을 만들어주는 빛이다.
환자들 뿐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로 별 거 아닌 것들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선운사 가는 버스 안이 어린이집 버스처럼 짝꿍들이랑 친하다.
나는 봄꽃이 피기 전에 선운사에 다녀왔으니까 반년이 지난 셈이다.
나보고 컸다고 그럴까?
아니면 늙었다고 그럴까?
계곡에 물이 많이 줄었지만 초록숲의 내음은 표표했다.
숲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숲에서 누가 나이를 들먹이겠는가 싶다.
지천명이 넘었어도 예순이 다 되어가는 누님이어도 종달이처럼 재잘재잘 말도 재미있고 걸음도 가볍다.
새로 온 스물셋 운동처방사 선생님 연애 이야기도 자꾸 듣고 싶어 한다.
다들 마음이 온통 소풍이다.
선방禪房에 모여 차를 마시고 한담을 즐기는 모습이 좋아서 사진을 찍으려다 그만두었다.
엊그제 서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향하신 마트 사장님에게 전하려다가 휴대폰 카메라는 내려놓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식사는 물론이고 운동이며 요가, 명상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사장님이다.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여 고생했는데 결국 그것이 폐렴 때문이었단다.
상태도 심각해서 응급실에서 52시간 만에 병실로 옮기셨다고 그런다.
어제저녁에는 다행히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한결 힘이 붙은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생하셨네요.
사모님도 애쓰시겠네요.
"우리가 시험을 보고 90점 받으면 못 봤다고 그러지 않잖아요? 그만하면 잘했네, 그러잖아요?"
"내가 치료를 아주 열심히 받았다고는 못해도 그래도 나름 한다고 했었는데...."
좋아졌다는 말을 기대하고 찾았던 병원에서 전이轉移의 소견을 듣고 한동안 낙심하던 사장님이 하던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환자 앞에서는 정말이지 할 말을 못 찾는다.
가만 듣고만 있기에도 미안해서 어정쩡하게 고개만 끄덕이다 만다.
혀가 갈라지고 허옇게 마른입에 침을 바르면서 누구랄 것도 없이 귀를 세운 수신인들에게 전하는 토로吐露.
"이거는 백 점을 맞아야 하는 시험 같아요."
"99점을 맞아도 안 되는..."
선운사 처음 가던 날에 사장님은 일부러 자기 마트 앞에 차를 세우게 하고 먹거리들을 실어 옮기셨다.
어깨에 힘도 좀 들어가고 목소리도 높게 척척 앞서서 걷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는 지금보다 환자들도 더 많았다.
그때 찍은 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면 모두가 환한 모습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누구는 남고 누구는 떠난 계단을 망연스레 바라본다.
환자는 무조건 좋은 거 먹어야 한다면 하나라도 빛깔 좋고 탐스러운 것들만 챙기던 모습이 선하다.
다 나으면 꼭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던 사장님이다.
"여러분, 내가 해보니까 '암' 별 거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다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내가 다른 거 말고 그거 하나는 꼭 하고 싶네요, 강 선생님.
또 하나의 페이지를 우리는 넘어가고 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는 페이지는 의미가 없다.
그건 여백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